상흔
나는 나이 든 부모의 외동아이로 자랐다. 내가 작가가 되는 데 어떤 초년기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는지 그 목록을 작성한다면 ‘외동아이, 나이 든 부모’가 상단에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자격 요건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때는 다른 걸 바랐다. 당연히 외롭고 고립된 어린 시절이 글 쓰는 삶에 전제되어야 할 조건은 아니겠지만, 분명 도움이 되기는 했다. 부모는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이었다. 우리 집은 코셔Kosher 가정이었고, 안식일인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는 차를 운전하지 않았고, 전등과 라디오,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고, 피아노를 칠 수 없었으며, 숙제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야 했다. 토요일 아침에는 어머니가 부비동두통 때문에 집에 머무르는 동안 아버지와 800미터쯤 걸어서 유대교 회당으로 갔다.
집은 조용하고 티끌 한 점 없었다. 먼지나 얼룩, 소음처럼 난삽한 것들은 허용되지 않았다. 가사도우미들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경우가 없었다. 어머니의 기준에 맞추어 집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표면이란 표면은 죄다 반드레했다. 날마다 액자의 먼지를 털었다. 일주일에 세 번 시트와 베갯잇을 다림질했다. 내 서랍 안은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파란색 단스킨 상의가 파란색 단스킨 하의 옆에 완벽하게 개켜져 있는 식이었다. 달마다 해충업체에서 사람이 왔다. 2년에 한 번씩 유독성 곰팡이를 제거하는 사람이 왔다. 여름철에는 제초업자가 제초기와 울타리를 다듬는 장비를 들고 와 뉴저지 교외의 우리 집 정원을 깔끔하게 단장했다.
통제가 중요했다. 우리가 바짝 대비하고 있던 건 불결한 삶이 아니었다. 집 안 공기에 비밀들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부모의 말에는 늘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단단한 낱알처럼 숨겨져 있었다.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다운 본능으로 나는 부모가 삶을 들끓고 소란스럽고 무시무시한 거울 방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로부터, 자신들의 역사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다스 킨트”das Kind, ‘저 아이’라는 뜻, 둘 중 한 사람이 엄격한 목소리로 속삭이곤 했고, 내가 방에 들어가면 그들은 대화를 멈추었다. 나는 부모를 사랑했지만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삶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그들의 것 아닌 다른 방식을 몰랐다는 점이다.
이렇듯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귀를 기울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형제자매가 없었으므로 시간이 아주 많았기에 생각해낼 수 있었던 모든 방식을 동원해 엿듣고 엿볼 수 있었다. 문간에 숨었고, 계단참에 웅크리고 있었다. 집의 인터콤 시스템을 만지작거리며 부모 중 한쪽이, 혹은 둘 다 있을 것 같은 방을 찾아 주파수를 맞추었다. 부모가 저녁식사를 하러 외출하고 아래층에서 베이비시터가 시트콤 「패트리지 가족」The Partridege Family을 보는 동안에는 캐비닛 속 서류를 뒤적거렸다. 한 벌씩 비닐커버로 씌운 캐시미어 스웨터들과 정품 상자에 든 구두며 지갑 따위가 있는 어머니 옷장도 뒤졌다. 나는 뭘 찾고 싶었던 걸까? 단서를, 근거를 찾고 싶었겠지. 우리 집에는 거의 모든 방에 전화기가 있었는데, 어머니 서재가 있는 전화기에는 수화기를 들면 다른 사람이 다른 전화선 수화기로 통화 내용을 듣는 걸 방지하는 작은 장치가 있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할 때마다 그 장치를 쓴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들어서는 안 될 얘기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염탐하면서 문학 수업이 시작되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알아내고, 발견하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가 자라서 되고자 하는 사람, 되고자 하는 것을 위한 훈련이었다. 작가가 된다는 건 내게 우주인 되기보다 먼 얘기였다. 나는 작가라고는 한 명도 몰랐다. 내가 살던 동네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밤마다 이불 밑에서 손전등을 켜고 읽었던 책들과 누군가, 말하자면 혼자 방에서 언어와 사고와 생각 들로 씨름하는 한 여자가 실제로 그런 책들을 쓰면서 삶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란히 두지 못했다.
나는 탐정처럼 슬그머니 움직였다. 소리 내지 않고 계단참에 숨는 법을 익혔다. 부모가 겪는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그걸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다. 그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삶이란 슬퍼 보인다는 것이 전부였다. 삶은 말라비틀어졌고, 헛되고,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열한 살에서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방에 숨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상상력을 발견했고, 그러면서 아버지의 근심과 어머니의 두통에서 자유로워졌다. 부모가 서로에게 실망했다는 느낌과 그들이 내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다스 킨트!’에서, 안식일의 규율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나는 방문을 닫고 잠갔다. ‘엄마, 아빠,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이야기를 꾸며냈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때로는 모든 말이 사실인 것처럼 썼다.
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작가가 될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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