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나운 조짐
세상 모르며 방황하던 20대 초반, 나는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고 결정했다. 실은 그저 우연히 내린 결정이었다. ‘일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두고 친구들끼리 밤샘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내린 선택이었다. 친구들이 이야기했던 소중한 것들, 예컨대 진리, 정의, 자유, 아름다움, 돈, 명예, 권력 등보다 더 소중한 가치로서 나는 사랑을 택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뾰족한 근거 제시도 없이 막무가내로 우겼던 것 같다.
어쩌면 그건 피가 뜨겁기만 했던 젊은이의 얄팍한 직관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심연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풋내기의 객쩍은 주장에 가까웠을 것이다. 숱한 대화 내용이 그렇듯이, 쉽게 잊힐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나는 이따금 젊은 날의 이 대화를 기억해 냈다. 아니, 기억하려고 노력했다기보다, 우긴 것이 창피해서 잊고 싶을 만한데도 이상하게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의 내 발언을 어떤 식으로든 해명하고자 했다. 정말 기묘한 일이다.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라는 롤랑 바르트의 진단은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도 적절해 보인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나는 사랑 담론의 고독에 동참하려 한다. 앞으로 남은 생도 기꺼이 젊은 날에 내뱉은 말을 입증하는 데 바칠 생각이다. 심지어 내 일생만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 아이가 생겨나자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를 가훈으로 삼기까지 했으니, 여전히 세상 모르는 한심한 인간이란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에는 사랑에 대한 명문이 수록되어 있다. 아마 김수영 시인이 이 대목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의 변주곡」에 등장하는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는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리라. 사랑의 좌절은 몹시 아리지만 아름답다. 젊다는 증거이기에 그렇다. 이 경우 젊음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인식의 성숙 여부다. 사랑에 빠져 사랑에 좌절하는 자가 젊은이다. 마음대로 안 된다고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더 자라면 된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젊은이의 아름다운 특권이니까. 릴케의 목소리를 직접 옮겨 보기로 하자.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과해진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궁극의 것이자 최후의 시련이며 시험으로서, 다른 모든 일은 단지 사랑을 위한 준비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초보자인 젊은 사람들은 아직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온 존재를 걸고, 그들의 고독하고 불안하며 위를 향하여 맥박치는 심장의 주위에 집중된 모든 힘을 다하여 그들은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보다 고양되고 보다 심화된 고독을 의미합니다. …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 자신이 세계가 되려는 숭고한 동기입니다.
요즘 시대에 사랑을 입에 담는다면, 아마 삼류철학자로 분류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줄기차게 사랑을 말할 것이다.그렇다고 남발한다는 게 아니라 소중히 아껴가며 말하겠다. 고매한 척하느라 공허한 철학 개념을 나열하는 데 아까운 생을 낭비할 수 없다. 철학의 영웅들이 만들어 놓은 권위 있고 중후한 개념의 첨탑 뒤에 더 이상 숨고 싶지 않다.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 수 있는 사랑의 잣대로 철학적 역량과 보편성이 검증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은 내게 한 사람의 사유수준을 측량하는 리트머스 종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해 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의 철학 수준을 말해 주겠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사랑에 대한 신뢰, 이건 모든 믿음의 초석이다. 믿음이란 것도 종국에는 사랑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어단어 believe 안에 있는 lieve는 love를 뜻한다.독일어의 glauben/lieben도 마찬가지다. ‘너를 믿는다’라는 말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과 동의어다.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믿고 생각思=愛하는 것, 그 이면에 벌써 사랑이 깔려 있다. 사랑이 없다면, ‘언젠가 진리가 결국 밝혀지고 선이 악을 이긴다’라는 아름다운 믿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굳이 비교하자면, 사랑이 진선미眞善美 셋보다도 더 근원적인 가치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서 나는 철학적 화두에 변화를 주었다. 처음에는 실체론적 사유방식을 격파하는 ‘사이between’를, 다음에는 서양 문화의 핵심 키워드로서 ‘멜랑콜리melancholy’를, 최근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키워드로서 ‘공생symbiosis’을 화두로 잡았다. 이번 책에서는 그동안 미처 논의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고, 흐트러진 생각을 다시금 간명하게 다듬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과거 사유를 압축적으로 간추린 요약본이 미래 사유의 스케치임을 확인했다.
이번 책을 만들면서 더욱 분명해진 것이 있다. 칸트의 별이 도덕률이고 하이데거의 별이 존재라면, 내 별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가시적인 화두였던 멜랑콜리와 공생, 그 ‘사이’에 묵시적인 사랑이 있었다. 글머리에 소개한 젊은 시절의 기억을 ‘일생의 질문’과 연결지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가능했던 일이다. 몇몇 독자에게는 조악한 스케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미심장한 밑그림이다.
이제는 사랑이야말로 철학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철학의 운명이다. 사랑의 앎을 소명으로 삼는 철학자에게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기실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인 ‘자기-지칭self-reference’임을 이제야 깨친다.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한다. 진정한 ‘자기애’에서 자기Self란 나르시시스트 개인의 ‘나’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itself다. 참된 자기애란 ‘사랑의 자기 사랑’을 뜻한다. ‘누구나 나르시시스트다’라는 나르시시즘의 보편성 주장은 참된 자기애에 비한다면 형편없이 편협하기만 하다. 참된 자기애는 자타自他가 없는 절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절대성에서 (바르트, 릴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고독이 유래한다.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한하고 고독하다.
이런 사랑이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과 시간대 전역을 채우고 있다. 마치 예나 지금이나 모든 소설, TV 채널의 드라마, 대중가요, 영화 등에서 지겹도록 사랑 타령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부재를 개탄하는 시대에도 사랑은 숨은 채로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사랑이 지배한다. 코로나19 시대이든 세계화 시대이든 4차 산업혁명 시대이든, 혹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이든 피로 사회이든 포스트휴먼 사회이든, 어느 시대나 사회 할 것 없이, 문제는 사랑이다. 세상과 나를 움직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랑을 알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
이 책은 비루한 일상에서 웅대한 사랑이 움트고 성장하며, 모욕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관철해 나가는 사랑의 ‘사나운 조짐’을 간파해내고자 한다. 언뜻 한 움큼의 작은 눈덩이처럼 보이지만, 대규모 눈사태를 예고하는 사나운 조짐을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일부 사람들자칭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사랑은 통속적이고 저급하고 동물적인 것처럼 비추어진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포함해 누구나 손으로 하트를 그려가며 사랑을 표현한다. 피상적인 사랑 표현은 사랑의 부재를 겉으로나마 ‘위장’하기 위한 가련한 몸짓이다. 동시에 사랑을 목말라하는 ‘비명’이기도 하다.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것, 비명을 질러 주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직 최악의 상태는 아님을 뜻한다. 그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피상적으로라도 사랑이 다뤄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상태는, 고통을 아예 느끼지 못하거나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규모의 고통 때문에, 가식적인 사랑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때때로 사랑의 심해에 깊숙이 빠져볼 필요가 있다. 비유컨대, 이 책은 사랑의 심해를 탐사하는 잠수정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사랑죽음의 참된 의미를 찾고제1부, 서로 다른 사랑론에 뿌리내린 두 정서, 즉 한恨과 멜랑콜리를 비교하고제2부, 지금 이곳의 현안들을 사랑의 관점에서 되짚어 볼 것이다제3부. 사랑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사랑 타령이 지겨워진 현대인에게, 사회적 거리 두기와 집합 금지 등으로 코로나 블루신종 멜랑콜리에 시달리고 있는 신인류에게, 우리의 잠수정에 동승해 보기를 권한다.
심해에서 만나게 될 사람 중에는 철학자 외에도 ‘사나운 조짐’이란 멋들어진 문구를 지어낸 김소월과 2021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김수영 그리고 내가 무척 경애하는 정현종, 고정희를 비롯한 우리의 시인들과 추상 화단의 거장, 오수환 화백 같은 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진면목을 또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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