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나는 한 번도 장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의 부모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부모님에게 그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만약 내가 그런 질문을 했더라도 부모님은 나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우리 삶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란 식의 대답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의 장애를 수용했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부모였다. 그들의 방식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장애를 수용했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부모였다. 그들의 방식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소아마비에서 회복되었을 때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나는 걸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상태였다. 30대가 되어서야 그때 의사가 했던 제안에 대해서 들었다.
“딸아이를 시설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사가 해준 조언이었다.
그 의사가 어떤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나의 가족이 독일 이민자라는 것과도 상관이 없었다. 나쁜 의도도 아니었다. 그는 두 살짜리 아이를 시설에 보내는 것이 자기 앞에 있는 어린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을 것이다.
1949년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설에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시기였다. 부모가 시설에 있는 자녀를 방문하는 것조차 권장되지 않았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힘든 일로 여겨졌다. 장애 자녀는 가족에게 커다란 상처였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는 가정은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이 의사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 가족은 이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시설에 보내자는 말에 부모님은 분명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홀로코스트에 의해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10대에 미국으로 보내졌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이었고,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 사람들이 아이들의 안전을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더 악화될 줄은 몰랐다. 열네 살이었던 아버지는 브루클린으로 가서 삼촌과 함께 살았고, 운 좋게도 다른 형제 셋도 곧 미국으로 건너왔다. 외동이었던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카고에 가서 살아야 했다. 미국에 있던 어머니의 먼 친척이 독일의 어머니 가족을 방문해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의 조부모는 당신들의 외동딸을 그 먼 친척과 함께 떠나보냈다.
나는 가끔 어머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보곤 했다. 열두 살의 어느 날, 여태껏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2주 후에 갑자기 독일을 떠나 시카고에서 그 낯선 사람들과 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어머니는 늘 가족이 다시 함께할 거라고 믿었다. 전쟁 중에도 돈을 모아 부모님을 모셔오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나중에 어머니는 부모님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내가 10년 일찍 태어나 독일에서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면 어땠을까? 독일 의사도 아마 시설로 보내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얀 벽과 룸메이트가 있는 작은 방에서 간호사들이 먹여주는 음식을 먹고 자라는 대신 특별한 클리닉으로 보내졌을 것이고,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이전에도 장애 어린이를 퇴출시키는 시설이 있었다. 후에 대량 학살로 이어질 히틀러의 시범 프로젝트는 먼저 장애 어린이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의사들은 장애 자녀를 특별히 지정된 소아과에 보내라고 권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을 고의로 굶기거나, 독극물 주사를 놓았다. 그 프로그램이 더 큰 아이들까지 포함하는 쪽으로 확대되자 의사들은 가스 주입 실험을 했다.
5000명의 아이들이 이 시설에서 살해되었다.
나치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사회의 유전적, 재정적 짐으로 여겼다.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여겼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의 권위 있는 의사가 “우리가 당신의 딸을 데려가서 키우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부모님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어떤 아이들은 먼 곳으로 보내지고, 어떤 아이들은 나라에 빼앗겨 영영 돌아오지 못한 ― 이 모든 것은 체계적인 비인간화와 살인을 부추기는 캠페인의 일부였다 ―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딸이 장애인이든 아니든 함께 살기로 했다.
부모님은 완고하거나 권위에 무조건 반대하는 분들이 아니었다. 두 분은 사상가였다. 그들은 증오와 비인간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라 전체가 어떤 것을 보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경험했다. 결과적으로 부모님은 어떤 것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어떤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반드시 그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권위 있는 사람의 지시이든, 선생님이 수업 중에 한 말이든 말이다. 부모님은 과거 혹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배우려고 애썼다. 어머니 일제 휴먼과와 아버지 베르너 휴먼은 앞을 향해 나아갔다. 특히 어머니 일제는 더욱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 일제는 낙천주의자였고 투사였다.
그 딸인 나 역시도 그렇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점거했을 때나 뉴욕시 교육위원회와 싸울 때 내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나를 내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만들었다.
1장
나비
사람들은 내가 했던 일들이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거라고 단정하는 남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말들을 기꺼이 뒤엎을 의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 홀로’가 아니라 ‘우리’였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세상을 바꾼 이야기는 어떤 것이든 항상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든 이야기다. 그 이야기 안에는 많은 아이디어, 많은 논쟁, 많은 토론, 늦은 밤까지 계속된, 매우 효과적이었던, 결국 웃음으로 끝나곤 하던 많은 브레인스토밍, 많은 신념가들, 많은 우정, 많은 실패, 거의 포기나 다름없던 많은 순간들, 그리고 많고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우리 곁을 떠난 영웅과 지금 살아 있는 영웅, 이 많은 영웅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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