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시민으로 늙으려면
자식농사에서 시민권으로
누구나 노인이 된다. 석가모니의 출가는 ‘자신 안에 살고 있는 노인’의 발견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석가모니는 왕자였을 때 궁 밖 나들이에서 병들고, 이 빠지고, 주름투성이인 노인을 만난다. 모든 사람은 노인이 되는데, 노인이 되면 이들처럼 될 것이라는 마부의 말을 듣고 석가모니는 외친다.
약하고 무지한 존재여, 애석하구나. 젊음의 허영으로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궁으로 서둘러 돌아가자. 인생의 즐거움이 무슨 소용인가. 장차 나 자신도 늙음의 무덤으로 들어갈 운명인데!
석가모니는 자신도 언젠가 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간과 인생의 본질을 고민하던 끝에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고행을 시작한다.
늙으면 모두 석가모니가 만난 노인처럼 되는 것일까? 분리이론에 따르면 노인이 되면 경제적·심리적·사회적 측면에서 분리가 일어난다. 핵심은 경제적 분리이다. 2018년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3.4%에 달했다. 늙어서도 일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2020년 노인 취업률은 34.1%에 이르렀다. 노인 빈곤율과 노인 취업률 모두 OECD 회원국 중 1위이다. 이 상태에서는 심리적·사회적 분리 또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식농사를 잘 지으면 된다. 산업화시대에 최고의 노후보장 수단은 잘 키운 자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자식들은 부모는 고사하고 자신의 자식조차 돌보기 힘들어한다. 청년들은 자기 자신의 삶도 버거워하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자식에 기대기가 어렵게 되었다.
자식농사가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국가농사를 잘 지으면 된다. 국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들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베버리지는 1942년 국가가 다섯 개의 악을 막아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결핍, 무지, 질병, 불결, 나태를 소득보장, 의무교육, 공공의료, 공공주택, 완전고용으로 막아야 한다! 이것은 시민의 권리이다!’ 유럽에서 필자가 만난 노인들은 석가모니가 만난 노인과는 달리 경제적 분리 없이 보통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이는 자식보장이 아니라 시민권을 통한 국가보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민권 이론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시민권은 어떻게 확립되었을까? 「베버리지 보고서」를 읽은 시민들이 시민권을 권리로 자각하고, 토론했으며, 이를 관철하기 위해 조직화했기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자기 목소리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시민권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노인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경제적 궁핍 없이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선배시민이란
힘없고 무기력하고 사회적인 짐인 잉여인간으로 노인을 바라보는 용어가 ‘No人’이다. No人은 사람이 아닌 존재로 늙은이라 호명된다. 늙은이는 돌봄의 대상, 잉여인간, 이등국민으로 자식과 사회에 짐스러운 존재이다. 새로운 노인이 등장하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로 여가 및 취미생활, 자기계발, 경제활동을 즐기는 생산적이고, 활동적이며 성공한 노인이다. 청바지를 입은 노인으로 상징되는 액티브 시니어는 점차 많아질 것이다. 700만 명에 이르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노인인구로 진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액티브 시니어를 새로운 노년상으로 삼고 희망을 가져도 될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액티브 시니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성공한 노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더구나 수명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 성공한 노인조차도 경제적으로 안심하기 어렵다. 액티브 시니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가능하다. 이들은 개인주의 경향이 강해 타인이나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취미·여가와 가족의 성공에만 관심을 갖는다. 공동체의 일이나 국가보장, 즉 시민권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정적이다. 자수성가한 노인들은 문제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지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시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시민권 이론을 바탕으로 노인론을 전개한다. 즉 노인을 시민으로 본다. 시민은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 달리 말해, 시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보장의 대상이다. 노인도 시민이므로 당연히 그 자신의 국가에 대한 기여나 업적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
시민이 국가보장을 받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누구나 보통 사람으로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가보장을 받게 된다면, 노인도 젊었을 때처럼 각자의 개성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시민은 노후에도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삶을 위한 국가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이 책은 시민으로서의 노인을 ‘선배시민’이라 호명하고, 관련 철학과 실천을 ‘선배시민론’으로 체계화한다. 선배시민이란, ‘시민권이 당연한 권리임을 자각하고, 이를 누리며, 공동체에 참여하여 자신은 물론 후배시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노인’을 말한다.
선배시민론은 첫째, 생존을 상징하는 ‘빵’을 늙어서도 품위 있게 획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빵을 국가로부터 권리로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시민은 국가보장을 권리로 자각하는 노인이다. 둘째, 선배시민론은 노인을 선배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노인은 돌봄의 대상에서 돌보는 주체가 된다. 선배시민은 시민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실천하는 노인이다. 이를 위해 노인들만이 아니라 후배시민들과 연대함으로써,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선배시민론은 노인을 시민으로 규정한다. 노인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빵을 권리로 받아들여 모든 시민에게 분배되도록 요구하는 실천을 한다. 그는 시민이자 선배로 실천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의미하는 ‘장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선배시민론은 노인이 시민이자 선배로서 빵과 장미를 획득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이를 위한 실천 방법을 이야기한다.
책의 흐름
이 책의 1장에서는 노인에 대한 세 가지 담론을 살펴본다. 첫째, No人이다. 이 담론에서 노인은 대개 늙은이라고 불리는데, 노인을 사람도 아닌 존재라고 비하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둘째, ‘Know人’이다. 노인을 현자로 여기는 입장으로 어르신이라 칭한다. 셋째, 액티브 시니어이다. 활동적 노화, 생산적 노화, 성공적 노화 이론에 기반하는 용어로 노인을 활력 있는 존재로 본다. 여가 활동, 취미 생활, 자기계발에 힘쓰는 존재이다.
Know人, 즉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노인에게 부담스럽다. 노인을 지혜롭고, 자비로운 존재로 신비화하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나잇값을 하라’고 채근하는 듯하다. 액티브 시니어는 돈이 있는 성공한 소수의 노인만이 될 수 있다. 이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2장은 세 노인상에 대한 대안으로 선배시민을 제안하고 선배시민론을 전개한다. 선배시민은 첫째, 시민이다. 배고프지 않을 권리,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고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 불결하지 않은 곳에서 잠을 잘 권리, 소득 결핍이 발생하지 않도록 연구할 권리를 가진 존재이다. 시민은 늙어도 사회와 경제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선배이다. 선배는 공동체를 안전하게 만들고, 동료와 후배시민을 위해 실천하는 존재이다. 셋째, 인간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차별과 늙음에 대해 성찰하는 존재이다.
3~5장은 앞서 말한 선배시민의 세 가지 특징을 자세히 다룬다. 3장은 시민의 집을 살펴본다. 시민이라면 아파도 실패해도 괜찮은 안전한 집에 살아야 한다. 4장은 선배로서 ‘나 때는’이 아니라 ‘너 때는’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노인의 태도를 살펴본다. 그는 후배들과 함께 부당한 권력과 질서를 비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한다. 5장은 노인을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 상식을 의심하고, 늙음이 주는 자유와 죽음의 긍정적 측면을 이해한다.
6장은 선배시민의 실제 실천 사례를 세 가지 범주에서 살펴본다. 자신을 성찰한 ‘소크라테스 유형’, 내 주위를 둘러본 ‘헬렌 켈러 유형’, 시민을 조직화한 ‘은발의 표범 유형’에 속하는 실천 사례를 통해 한국의 노인들이 선배시민으로 살아온 기록을 제시한다.
노인은 생계를 위한 빵과 더불어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것, 즉 장미를 필요로 한다. 선배시민은 시민의 권리로서 빵을 요구하고 시민권 실천을 통해 권리로 빵을 얻어 노후에도 보통 사람으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시민권이 실현된 사회에서는 누구나 보통 사람으로 품위 있게 살 수 있다. 빵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노인은 각자의 개성과 고유성을 드러내고, 더 나은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다. 이처럼 선배시민론은 노인이 권리로 빵을 얻어 노후에도 보통으로 살면서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는, 장미를 가진 존재가 되는 방법을 제시한다.
선배시민대학 수료자 한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뒷방 늙은이가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정리 중이었는데, 후배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니 감사하다’는 말씀이었다. 우울증을 앓고 계셨던 어르신 한 분은 선배시민 리플릿을 접하고 ‘뒤통수를 한 방 맞고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고. 살아갈 희망을 갖게 됐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하였다.
자신을 선배시민으로 인정하는 순간, 노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된다. 이 책은 노인이 자기 목소리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선배시민들이 공동체에 대해 성찰하는 가운데 다른 시민들과 대화할 때 비로소 실현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궁극적으로 이 땅에 나이 들고 퇴직한, 아픈 노인들이 빵을 권리로서 품위 있게 얻고, 공동체의 일에 참여하며 누구나 시민으로 익어가는 보통 사람을 살아가는 철학과 실천 그리고 방법을 모색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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