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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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표류하고 있다. 나는 인문학이 어느 곳으로 표류할지 예견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내 목표는 인문학의 미래를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의 미래에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인문학의 슬픈 상황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인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하는 일은 비전문가들에게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마련이다. 실제로 가르치고 간행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굳이 배우거나 읽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당수의 학생이 대학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든지, 상당수의 학부모가 대학은 돈 낭비가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 것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과 실제로 하는 일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오로지 인문학의 가치 평가에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에 전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에 대해서, 우리의 목표에 대해서 반드시 숙고해야 한다. 인문학은 바로 이에 관한 내용이 되어야 마땅하다. 비록 대부분 (특히 인문학 분야의) 교사와 학생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인문학은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고등 교육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정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관한, 그리고 목표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내 목표는 이에 대한 진단을 제공하는 한편, 인문학을 어떻게 가르치고 왜 가르쳐야 마땅한지에 대한 견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류의 미래임이 명백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인문학의 상황이 걱정스럽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간략하게 답변해야 한다.
종교와 철학, 미술과 음악, 문학과 역사라는 여섯 가지 큰 분야를 통틀어 ‘인문학’이라고 종종 지칭한다. 이 가운데 처음 네 가지의 경우,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에서는 보통 서로 다른 학과에서 연구하는 반면, 문학은 (예를 들어 영어나 로망어처럼) 언어나 언어군 한 가지씩을 다루는 여러 학과에서 연구한다. 이 여섯 가지 분야는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과 대조된다. 인문학은 과거에만 해도 더 위신이 높다고 간주되었지만, 2차 대전 이후로는 자연과학이 가장 큰 위신과 재정 지원을 얻게 되었으며, 사회과학도 그에 비견할 만한 성취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학적’이라는 이유에서 일종의 반사적 영광을 얻고 있다. 여러 역사가들도 인문학자라기보다는 사회과학자로 간주되며, 다른 ‘인문학’ 학과의 여러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이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하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1970년대에야 대두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위협적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이들이 교사로서 일자리를 찾기가 갑자기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1940년대의 출생률 급증이즉 베이비 붐이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1960년대 내내 이루어진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의 급속한 성장이 갑작스레 중단되고 말았다. 한때는 교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훌륭한 대학원생이라면 박사 학위 과정을 다 마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높은 봉급을 주겠다는 초빙 제안을 받았지만, 그 시기가 지나자 새로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둘째로 지난 사반세기 동안 워낙 많은 자리가 (종신 재직권을 부여하는 교수 직위도 포함해서) 젊은 사람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은퇴로 생기는 빈자리가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결과는 예측하기 쉬운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성 학계를 급습했으며 대학원들은 이처럼 변화된 상황에 극도로 느리게 적응했다.
비교적 최근인 1961년에 카네기 교육진흥재단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의 전직 이사장이 내놓은 『대학원 교육Graduate Education』이라는 저서를 보면, 핵심 문제는 대학이 1970년대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히 많은 박사 학위 소지자를 내놓지 못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 저자는 “사실 확인 차 40여 개 종합 대학을 방문했다.”고 주장하면서, “박사 학위 소지자의 부족 현상 증대” 운운하는 장章에 각종 수치數値를 잔뜩 집어넣어 두었다. (이것 역시 과학의 위신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하지만 1975년에만 해도 미국에는 철학 분야 교사 일자리를 찾지 못한 박사 학위 소지자가 무려 2000명에 달했으며, 이런 문제는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났다.
1976년 2월 4일자 《뉴욕 타임스》38면 기사를 보면, “미국 노동통계국 산하 인력 및 직업 전망 부서의 가장 최근 수치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85년까지 …… 예술 및 인문학 분야 박사 졸업자의 전망은 암울할 것으로 추산되는데 …… 졸업자가 7만 9600명인데 비해 이용 가능한 직위는 1만 5700개에 불과하다.” 결국 80퍼센트 이상이 자기가 훈련받은 분야의 일자리를 찾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상황이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 특히나 심각한 까닭은, 이들 분야의 박사 학위는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에서의 교사 경력을 위한 인증 기능 이외에는 다른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박사 학위를 얻은 과학자라면 교사 경력 이외에도 다른 선택지, 심지어 더 수지맞는 선택지를 갖게 마련이다. 어쩌면 현재의 박사 학위 소지자 잉여 인력을 이용해서 중등학교 교육을 향상하는 방안을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출생률 저하는 결국 이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회가 거의 없음을 뜻한다. 나아가 이런 혁신은 거꾸로 박사 학위가 없는 젊은이들의 중요한 직업 기회를 닫아버리고 말 것이다. 게다가 지금 가르치는 방식대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한 중등 교육을 진정으로 향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박사 학위 소지자 대부분은 비전문가 10대 학생을 가르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인문학 대학원 과정 대부분은 크게 줄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상당수의 과정은 (가급적 가장 덜 두드러진 것들부터) 완전히 포기되어야 할 것이며, 교수 대부분은 학부생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 교육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도 이렇게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본다면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육 문제는 중등학교 및 초등학교 층위에서부터 또는 그보다 더 먼저 우리의 가정 및 문화 환경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준비되어 있다면, 고등교육의 전망은 더 밝을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까지 다루는, 또는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다루는 서적이라면, 어마어마하게 길거나 대책 없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분야는 충분히 넓으며, 심지어 지금도 나는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기는 하지만 정작 절반도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분야인) 음악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해 약점을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과학에서 어느 부분이 허위이고 어느 부분이 유익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워낙 큰일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가급적 사회과학자가 해야 마땅할 것이다. 게다가 대학 진학 이전 시기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워낙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에, 현재의 맥락에서 간략하게 고려될 수는 없다. 반면 간략함의 미덕이란 것도 있으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서 나는 이 책에 언어 교육이나 창작 예술을 포함하지는 않았다. 양쪽 모두 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 주요 분야의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는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 여섯 가지의 교육을 제공하는 이유는 대개 똑같다. 따라서 이 여섯 가지를 통틀어 ‘인문학’이라는 간주하는 것이 이치에도 맞는 것이다.
오래전에 교육에 관한 최초의 주요 저술에서 플라톤은 우리가 지속되는 문제를 다루면서도 여전히 구체적으로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더 큰 질문들에 관심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내내 구체적이고자 했고, 심지어 (플라톤도 했던 것처럼) 강의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는 선까지 가려고 노력했다. 이 모든 사례에서 나는 한 학기가 10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했다. 상당수의 학교에서는 한 학기가 이보다 더 긴데, 그렇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터이니 오히려 좋은 일일 것이다.
추상성을 회피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예를 들어, 1장에서 네 가지 종류의 정신을 구분할 때에 했던 것처럼) 실례를 제시하고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다. 물론 특정인을 굳이 어떤 유형으로 분류하지 않기가 더 편하기는 하다. 어떤 저자가 특정인을 언급하는 바로 그순간부터 그 저자를 겨냥한 반박이나 적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인물을 다루어야만 비로소 유형이 구체화되게 마련이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이름에 익숙하지는 않을 터이니, 상당수의 독자는 때때로 친숙하지 않은 이름을 마주하고 당황할 것이다. 혹시 이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딱한 일이다. 독자로선 각자의 경험에서 딱 어울리는 실례를 찾아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첫 번째 장에서는 곧바로 따라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주제를 소개할 것이다. 주석을 덧붙임으로써 수선을 시도하는 대신, 이후의 여러 장에서 주요 주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책은 여섯 장 전체가 한 덩어리이므로, 각 장을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짧게 쓸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나는 고등 교육을 다룬 방대한 문헌에 관한 논의를 한사코 피했다. 나는 반대와 대안을 고려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보통은 내가 설교하는 내용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전에 간행한 저서에서 나는 종종 다른 학자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일관적인 견해를 매우 간략하게 내놓는 것, 그리하여 비교적 사소한 요점들의 논증 속에서 길을 잃는 법 없이 그 모두를 대번에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해 보인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나는 지금 잘못된 것들의 사례를 더 많이 제시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했다. 비록 그런 사례가 이 책을 더 재미있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산만한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독자는 ‘각자가’ 목격했던 여러 가지 함정을 문제없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목표는 그 기나긴 함정의 목록에 내용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딱 맞아떨어지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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