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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촛불을 들고 어떻게 싸웠나
― 2016/17 촛불항쟁의 문화정치와 비폭력·평화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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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과 문화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이른 봄 사이에 서울과 전국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련의 집회·시위를 일컬어 ‘촛불항쟁’, ‘촛불혁명’ 등이라 부른다. 아직 이 일련의 집회·시위를 부르는 합의된 이름은 없다. 대구‘항쟁’, 4·19‘의거’, 5·18광주‘민주화운동’ 같은 다양한 사례에서 보듯 민중봉기와 시민항쟁 등의 ‘명칭’은 오랜 기간에 걸친 해석과 기억의 쟁투 속에서 정립되어왔다. 정치인들이나 일부 지식인들이 2016/17 촛불집회와 시위를 ‘혁명’이라 부르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혁명’에 값하는 상황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촛불항쟁’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민중의 직접행동과 항거 전체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이고, ‘촛불집회’는 개별적 집회 자체를 가리킨다. ‘촛불’은 비유적으로 촛불항쟁에 나선 시민들을 의미하는 말로 쓴 경우도 있다.
대규모 집회·시위는 사회와 정치를 바꾸기 위해 일어나는데, 그 집회·시위 자체에서 ‘문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집회·시위 자체가 현존하는 사회의 문화를 바꾸기도 한다. 5·18 광주항쟁이나 6·10항쟁도 그랬다. 시민항쟁의 문화정치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논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일단 다음의 네 가지 주제를 다뤄볼까 한다.
①상징·언어·프레임·정동감정·이념·서사 등의 매개 작용
②광장 민주주의 ‘현장’의 문화와 주체성의 구성
③봉기·혁명의 문화적 효과와 가속주의
④문학·음악·미술·공연 등 부문·장르별 투쟁과 변화
상징·언어·프레임·정동감정
·이념·서사 등의 매개 작용
운동·봉기·항쟁은 반드시 문화적 매개물을 거쳐 촉발·전파·확산된다. 운동·봉기·항쟁의 대의·상징·언어·프레임·정동감정·이념·서사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파·확산되고 군중의 행동을 촉발한다. 예컨대 러시아혁명을 위시한 20세기 전반기의 세계 혁명에서는 신문과 종이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이것들은 결코 ‘제도권’에서 만든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봉기와 혁명의 주체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어내는 ‘비제도’, ‘비합법’ 인쇄물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 이를 레닌은 ‘전국적 정치신문’으로 이론화했다. 레닌주의 혁명론에서 신문은 혁명의 조직자 그 자체로 간주되었다.
이를 우리 역사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에서 만든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상당히 많은 격문, 삐라 등이 있었다. 그중에는 ‘신문’이라 불릴 만한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임시적인 매체조차 혁명과 항쟁에서 큰 역할을 해냈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삐라의 전쟁’이었던 해방기 거리정치는 물론,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투사회보』의 역할이나 유인물과 팸플릿의 홍수로 뒤덮였던 1987년 전후의 민중·민주 운동도 잊을 수 없다. 종이 매체는 제작과 배포의 용이함과 문자의 고유한 효능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나 중요하다. 2016/17 촛불항쟁에서 SNS를 위시한 디지털 미디어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지만, 종이 매체도 역할을 했다. 광화문광장 텐트 농성촌의 노동자·예술가 들은 『광장신문』을 발행했으며, 다른 여러 단체들이 만들어 뿌린 유인물들도 다양했다. 또한 ‘박근혜퇴진’이나 ‘이게 나라냐’ 등의 한 줄짜리 구호를 선명하게 써서 손에 든 종이 피켓도 시각 효과의 면에서 중요했다.
‘시대의 미디어’는 운동의 매개자나 양식 자체로서 ― 사회학에서 말하는 ― ‘사회운동 주기’와 중요한 관련을 맺는다. 1960년 4·19혁명에서는 라디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이미 20세기 중엽에 종이 매체의 중요성이 상대화되기 시작했다. 광주항쟁이 있었던 1980년대에는 영화 〈택시운전사〉가 묘사하듯 TV매체가 중요했으나 한국TV방송은 보도통제 때문에 광주의 진실을 방영하지 못했다. 광주항쟁의 진실은 오히려 외국 매체가 촬영한 ‘광주 비디오’와 사진 등을 통해 널리 전파되었다.
2000년대 이후, 2004년 반反탄핵 시위를 거쳐 2008년 광우병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부터는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가 가장 중요한 조직자네트워커가 되었다. 그 속성은 운동의 전개나 조직 방식 자체에 영향을 끼쳤다. 2008년 이래 주요한 집회·시위 현장을 생중계했던 오마이TV,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미디어는 2016/17 항쟁에서도 현장을 중계했다. 그런데 2016/17 촛불항쟁에는 두 세력이 새로 가담하여 수없이 많은 채널을 만들어냈다. 하나는 종편이었다. JTBC와 TV조선 등은 촛불항쟁을 촉발한 유력한 미디어-주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종편들의 경쟁적 보도는 시위에 대한 장시간 생중계로도 불이 붙었다. 주말마다 종편 방송이 전해주는 촛불시위 생중계는 시위의 전파에 큰 구실을 했다.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유튜브와 페이스북 라이브방송 등 SNS를 통한 개인적·자생적 미디어였다. 특히 SNS에서의 조직과 확산이 2016/17 항쟁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시위 참가에 대한 공감을 끌어냈고, 거대 미디어가 잡아낼 수 없는 집회·시위의 세부를 중계했다. 따라서 광화문 인근에 결집한 미디어와 채널의 수는 ‘참가자×N=무한대’였다. 그것은 정권과 지배의 ‘송출량’을 압도해버렸다. 이는 언제나 ‘버벅거려온’ 박근혜의 ‘베이비토크’를 풍자와 시국성명의 언어가 양과 질에서 압도한 현상과 비교될 수 있다. 레닌이 생각한 방식의 중심적 조직자로서의 채널은 없었지만, 다원화되고 그야말로 네트워크화된 수평적 채널들이 항쟁을 이끌어냈다.
광장 민주주의 ‘현장’의
문화와 주체성의 구성
광장 민주주의의 ‘현장’과 주체성은 시위나 저항행동 그 자체만이 아니라 연설·토론회, 문학·음악·미술·공연 등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문화예술의 작용으로 구성된다. ‘현장’의 문화정치는 집회·시위의 여러 의례와 집합행동 퍼포먼스를 통해 공감을 만들고 주체성을 창출한다. 의례의 양식은 물론 노래·방송 등을 통한 음향전과 시각 이미지의 창출이 중요하다. 또한 운동의 ‘브랜드’가 혁명을 퍼뜨리고 긍정적으로 상징할 수 있다. 예컨대 광화문 텐트촌의 예술가들이 만든 결박당한 박근혜상과 세월호를 태운 푸른색 고래 등은 참가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참여 ‘인증샷’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2016/17 촛불항쟁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촛불 그 자체였다. 소등 퍼포먼스도 의미가 크고 효과적이었다. 빛의 이미지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는 노래를 항쟁의 주제가처럼 만들기도 했다.
현장의 문화야 언제나 상수지만, 투쟁의 문화화·축제화는 2000년대 이후 증대되어왔으며, 2016/17 촛불항쟁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였다. 외적으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최순실·차은택 등의 ‘문화농단’ 탓에 문화·예술인의 참여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세월호 싸움 이래 기억투쟁과 확산에 문화적 퍼포먼스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더 많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화화’가 광화문의 집회와 공연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화된 투쟁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특히 주류 언론은 문화화를 곧 촛불의 ‘비폭력·평화’와 등가로 놓고 칭송했다. 더 나아가 그것을 고무·재생산하며 촛불의 진행 과정을 규정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래서 지배의 프레임에 갇힌 ‘비폭력·평화’를 비판하면서 ‘문화화’를 비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칭송과 비판 모두 ‘문화’를 촛불항쟁의 ‘비폭력·평화’와 등가로 놓았다는 점은 비슷했다. 물론 문화화는 광장의 성격과 공권력의 작용에 영향을 받지만, 광장의 문화는 단순한 수단도, 투쟁의 어떤 부산물·결과물도 아니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문화를 매개한다. 문화는 직접행동의 주요한 내용이자 형식 그 자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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