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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은
가능하다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알바노동자들은 20대에 잠깐 용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서울시 청년 아르바이트 직업 생태계 실태 조사에 따르면 알바노동자 1,016명 중 38.5%가 생활비 마련, 15.3%는 가정 경제를 돕기 위해서 알바를 한다고 답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생계를 위해 일한다. 사실 용돈과 생계비를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용돈이 생활비 아닌가? 한편 알바노동자 중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15.5%에 불과했다157명. 향후 1년 뒤 계획 역시 정규직 일자리 이동 18.6%, 공무원·공기업 시험 준비 5.3%, 어학연수 3.6%로 이직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적었다. 물론 학업 진행이 30%로 꽤 높지만, 현재의 알바 일자리를 유지하겠다는 사람이 25.8%로 생각보다 높았다. 그저 쉬고 싶다도 4.5%다. 알바를 중요한 일자리의 하나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자발적으로 알바노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자발적이라는 표현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인간의 선택은 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할 알바노동자들은 비료 값 파동에 따른 소 값 하락, IMF 경제 위기와 뒤이은 파견법 등으로 삶이 크게 흔들리면서 알바노동을 선택했다. 굳이 선택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알바노동을 어쩔 수 없이 하는 예외적인 노동으로 본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바노동을 하나의 선택으로 인정할 때 다양한 직업과 삶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는 너무 끔찍하다. 게다가 이 꿈들을 이룬 사람이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다. 소수의 자원을 독점한 사람에겐 과도한 책임이 뒤따른다. 장시간 노동부터 부모와 친척, 자식에 대한 부양까지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참아내야 한다.
지금까지 알바노동자의 노동 조건이 너무나 열악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여기서는 삶의 다양성과 가능성으로서의 알바노동, 주체적으로 사는 알바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들을 통해 다른 노동과 삶의 양태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좋다
올해 44세의 김민성은 선청성 뇌하수체 종양을 앓았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호르몬 분비가 되지 않아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뇌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조금만 다쳐도 바로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면역력이 약해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팔을 다쳐서 1년6개월, 맹장이 터져서 3개월 입원했다. 그렇게 5년을 병원에서만 지냈다. 몸이 좋지 않으니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27세에 큰누나가 신문사 지국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본사에서는 배달할 집이 200곳은 된다고 했는데, 막상 해보니 30집밖에 안 되었다.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구독자를 늘렸다. 3년동안 새벽길을 달린 결과 200집이 신문을 받아 보게 됐다. 본사에서도 갑자기 판매가 늘어나니 차량 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몸이 안 좋아지던 차에 함께 일하던 총무가 자기에게 지국을 팔라고 제안했다. 7천만 원에 넘기기로 하고 계약금 100만 원을 받았는데, 총무가 밤에 도망가 버렸다. 지국을 1억 1천만 원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난 뒤였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큰매형의 소 농장에서 7년 동안 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료 값이 올라서 인건비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 문을 연 막내 매형의 카페에서 일할 요량으로 서울에서 1년 동안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를 했다. 그런데 카페에서 일을 해보니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 패스트푸드점 배달 일을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파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몸이 안 좋아서 멀티태스킹도 하지 못하는 상황. 결정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패스트푸드점은 그런 그를 받아줬다.
차 없는 시골에서 살다가 빵빵거리는 차들이 즐비한 서울에서 오토바이 운전을 하니 좌회전 우회전도 힘들었다. 고객에게 “에휴, 그래가지고 배달 일 하겠어요”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시골에 본인 소유의 땅도 있는데 왜 편안한 곳에 내려가 살지 않고 힘들고 위험한 배달 일을 하는지 물었다.
“병원 입원만 5년이에요. 중1 때 머리 수술하느라고 1년, 스물아홉살 때 농장에서 소 키우면서 떨어져 팔이 부러져서 1년 6개월, 맹장 한번 터져서 3개월, 병원이 너무 지긋지긋해요. 가족들이랑 있으면 좋긴 좋은데 너무 답답해요.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취미 활동을 하는데 인라인 타는 게 너무 재밌어요. 싸돌아다니는 게 너무 신나요.”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가 배달 일을 선택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시간, 바로 ‘칼퇴’였다. 일을 마치면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퇴근하고 김포공항에서 새벽 4시까지 인라인을 타요. 모이는 건 밤 11시인데, 1시부터 4시까지. 몸 힘든 것도 모르겠어요. 오히려 동호회 사람들이 큰 힘이 돼요. 배달 일에 자긍심은 없지만 창피하지도 않아요. 장점도 많아요. 자기 스케줄을 뺄 수 있어요. 아파서 병원 간다거나 어머니 기일에 맞춰서 고향에 내려간다거나 할 수 있죠. 일반회사 같으면 상상도 못하잖아요.”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사람들이 배달하는 사람을 하찮게 여겨요. 배달 하다보면 콜라나 커피를 흘리는 경우가 있어요방지턱 때문에 커피는 조금이라도 흐른다. 10명 중 9명은 괜찮다고 넘어가는데, 1명은 꼭 트집을 잡아요. 한번은 손님이 햄버거가 식었다며 던졌는데, 가방 안에 던진다는 게 제 얼굴에 맞았어요. 엄청 기분 나빴어요. 사과도 안 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히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자긍심을 가질 수는 없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바뀌어야 할 것은 알바노동자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와 사회가 아닐까?
그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그에겐 나이, 장애와 상관없이 고용을 하는 맥도날드가 괜찮은 일자리다. 물론 몇 가지 조건들만 더 갖춰지면 좋겠지만, 한국은 잘 안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최저임금이 1만 원으로 오르면 지금 주 6일 하는 일을 주 5일로 바꾸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편견과 시선만 없어진다면 자긍심도 생길 것 같단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100년쯤 뒤에나 가능할 거라 했다.
정승범은 초등학교 때까지 잔디 깔린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으며, 집에 차도 2대 있었다. 1980년생인 그가 잘나가던 시절이라고 회상한 때는 1997년 IMF가 터지기 직전까지다. 아버지는 만도기계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던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IMF 이후 만도기계가 부도나면서 아버지 회사도 1998년에 부도 처리됐다. 그가 열아홉 살 때다. 집을 팔고 고모할머니 집 지하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이때 여명 808 대리점유통업으로 보인다을 시작했다. 사무실은 없었고 집에 여명808이 쌓여 있었다. 그가 하나만 먹어보면 안 되느냐고 물었는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했다며 웃었다. 아버지는 그가 군대에 있을 때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그의 생애에서 첫 노동은 현장 실습이었다. 공고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열아홉 살 때 팬택에 주야간 맞교대로 출근을 했다. “우리 집”이라고 말하면 연결되는 휴대전화 만드는 회사였다. 당연히 연장수당이나 야간수당 같은 건 몰랐다. 전공과 상관없이 그냥 출근했다. 한때 잘나가던 집안의 자식으로 공부에 대한 압박이 많을 것 같았지만, 부모님은 공부에 관해서 상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직장에 대한 기대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특이했던 게 학창 시절 생각하면 중학교 때는 농구, 고등학교 때는 음악, 지금도 메탈 음악 하고 있어요. 베이스예요. 너무 하고 싶었으니까. 음악을 하고 싶었지. 9시 출근, 6시 퇴근, 그런 정상적인 직장에 취업하기는 싫었어요.”
멋진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그가 선택한 노동은 알바였다. 비디오방, 닭갈비 집, 피시방, 레코드 집, 우동 집 등 가리지 않았다. 단순히 시간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길러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금세 이해가 갔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면접장에 들어갈 록커와 그를 지켜보는 불안한 눈빛의 면접관을 생각해보라. 군 제대 후엔 무대를 보고 싶어서 방송국 외주 파견으로 카메라 보조 일을 했다. 아버지 사업을 부도낸 IMF는 그가 자라 파견 노동자가 될 수 있도록 파견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견 노동자는 학력 제한이 없었다.
“공고를 나오니까 학력 때문에 못 들어가는 데가 많잖아요. 그나마 학력 제한도 안 걸리고 방송국이니까 재미있겠다 싶었죠.”
물론 2년이 못 돼서 잘렸다. 이때 알게 된 카메라 감독이 따로 차인 프로덕션에 보조로 들어갔다. 이 카메라 감독은 성추행으로 잘린 사람이었다. 욕도 많이 하고 술버릇도 고약해서 잘 맞지 않았다. 다른 노동 조건보다 사람과 맞지 않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무엇보다도 무대를 계속 지켜보는 직업이다보니 음악을 하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들었다. 이보다 더 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짝사랑하던 교회 친구가 지나가면서 음악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을 그만뒀다. 그 뒤로 3년 정도 짝사랑을 이어갔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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