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시아 혁명의 최전선
─ 케이팝 걸그룹 댄스
춤, 지역과
민족성의 핵
몇 년간 미얀마를 오가느라 싱가포르에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면서 50대 초반 아버지와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사는 싱가포르 가정에서 에어비앤비로 두 달간 산 적이 있다. 브라델뷰라는 아주 낡은 아파트였는데, 부녀는 변두리 널찍한 아파트를 값싸게 빌린 뒤 방 두 개를 외국인에게 단기 임대해서 생활비에 보태고 있었다. 남편은 중국계, 아내는 인도계였는데 문화적 차이로 일찌감치 헤어졌고, 양쪽 문화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딸을 아버지가 키우고 있었다.
나는 구석진 쪽방에서 살았는데 가끔 집주인 딸이 찾아와 말벗이 되어주었다. “아저씨는 무얼 공부해요?” 질문이 꽤 당돌한 아이였다. 흔하지 않은 한국인 손님이라는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외국 손님을 많이 겪어보았기에 스스럼없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아이는 아버지가 중국계이지만 외모는 누가 보아도 인도계 특유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정체성 고민이 있었을 테고, 자기 외모와 엄마를 따라 ‘인도인’이 되려는 결심을 몇 년 전부터 한 듯 보였다. 아파트 체육 시설에서 매주 있는 인도계 댄스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했는데, 북과 장구를 치면서 빙글빙글 도는 인도식 전통춤을 추었다.
“아저씨, 인도 여성이 되려면 인도 춤을 출 수 있어야 해요.”
“아, 그렇구나. 아저씨도 언제 구경 갈게.”
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하게 되면 ‘민속춤’과 ‘음악’에 대한 상식을 어느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태국과 캄보디아, 미얀마 무용의 차이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춤을 구분하려면 당연히 음악과 패션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전통의 핵심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국의 ‘한복 공정’ 음모론에 한국인이 격분했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의 전통은 의상, 춤, 음악이 하나로 표현되는 우리 몸의 일부이자 연장선이기에 한국인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전통 농업을 기반으로 신화와 기술, 역사가 패션과 사람 몸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결국 ‘토속적’이라는 것은 남성의 근육보다는 여성의 아름다운 몸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춤과 패션은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미디어이며, 게다가 여성의 춤은 대중성과 직업성까지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의 평범한 소녀가 인도 춤을 배워야 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류의 리더,
아시아 여성
한류韓流를 전업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한류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자연스레 한류의 미래를 묻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런데 한류를 정의하기가 무척 어려울 때가 있다. 문화에는 국적을 부여하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류 인기의 핵심 지역이라는 동남아시아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대중문화에 대한 민감한 촉 없이는 한류가 유행하는지 유행하지 않는지, 실제로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심지어 2015년 이전에는 ‘한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싱가포르만 살펴보아도 어디를 가든 중국어와 한자 간판을 찾아볼 수 있고, 쇼핑몰에는 일본식 마트와 식당이 널려 있으며, 거리에는 일본과 미국의 자동차가 가득하다. 아시아의 물질적 인프라는 대개 중국제와 일본제가 차지하는 식이다. 그런데 한류는 대부분 음악과 드라마여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이와 같은 디지털 콘텐츠는 공짜로 소비할 수 있는 경로도 다양해서 매출로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아시아에서 한류의 핵심 소비층이 경제 주력 인구가 아닌 10대와 20대 여성이라는 점도 판단을 더 어렵게 만든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중국계 인도 소녀는 현대무용을 좋아하고 인도식 전통춤을 배웠는데 그 와중에도 케이팝K-POP 댄스에 관심이 많았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소녀와 여성이 춤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사실 남성과 여성은 춤에 접근하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다. 이 대목은 내가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두루 확인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10~20대 소녀들이 반드시 추어야 할 춤 목록에 케이팝 댄스가 포함되어 있다.
왜 걸그룹
댄스일까
한국은 물론이고 동남아 전통춤을 살펴보면 두 발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처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의 옷이 몸을 꽉 끼게 감싸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여기서 인도는 약간 다른데, 이는 인도 여성이 바지를 입기 때문이다. 발을 높이 들거나 다리를 찢는 안무가 없다. 한쪽에서는 벼농사 전통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 대개 전통무용을 배워왔고 현대무용으로 일부 학생들이 발레나 디스코를 따라 하기는 했겠지만, 20세기 내내 아시아적인 현대 댄스가 널리 유행한 사례가 없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튜브’라는 신문명에 실려 케이팝이라는 신선한 콘텐츠가 아시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국 팝처럼 매번 순서가 바뀌는 자유분방한 댄스가 아니라 여럿이 자기 위치에 맞추어 정해진 안무를 소화하는 교과서적 댄스를 한다. 사실 케이팝을 부르고 춤을 추는 가수들이 예쁘고 멋지니 따라 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식으로 화장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친구들과 함께 합을 맞추는 케이팝식 댄스는 아시아에서 한류의 성장과 의미를 보여주는 가장 명징한 사례다. 이는 이미 한류를 다룬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증명한 사항이기도 하다. 그것이 케이팝 댄스인지 아닌지 꼬리표는 붙어 있지 않지만 따라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케이팝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아시아의 수많은 젊은이가 현대 대중문화의 한 소비재이자 교보재로 케이팝 걸그룹 댄스를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 생산자나 소비자들이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안이다. 민족성에 덜 민감한 10대 소녀들은 특히 한류 댄스에 즉각 반응한다. 한류 댄스야말로 이 시기 아시아 문명의 최첨단에 있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까닭은 케이팝이 보여주는 여성성이 무척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언어 표현력에 한계가 있어 적확하게 펼쳐놓을 수는 없지만, 그 진보성은 결국 한국 사회가 지난 수비 년간 보여준 성평등과 여성의 적극적 사회 진출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관계가 깊다고 본다. 손짓 하나, 발짓 하나는 물론 강렬한 눈빛과 선명한 표정은 현재 아시아의 어떤 나라 팝 문화에서도 내보이지 못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직도 많은 소녀가 무채색 히잡두둥을 쓰며, 몸이 드러나는 옷은 입지 못한다. 그럼에도 케이팝 댄스를 거침없이 따라 한다.
한국과 아시아 MZ세대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우리나라 걸그룹 있지Itzy나 스테이씨StayC라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 소녀들의 자신감과 예쁨, 나아가 멋짐까지 골고루 보여주는 아이돌이 바로 스테이씨다. 한눈에 보아도 ‘한국인’ ‘케이팝’이라는 꼬리표를 단 듯한 표정과 패션, 댄스를 보인다. 왜 이들이 한국식이냐고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블랙핑크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유럽식 명품으로 치장하고 영어 가사가 난무하는 노래와 유럽식 샹들리에로 가득 채운 뮤직비디오를 전면에 내세운 까닭에 이들이 ‘케이팝 걸그룹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스테이씨가 보여주는 무대와 표정은 그야말로 케이팝의 정석이자 미래다. 이런 케이팝의 정석은 아시아 여성 혁명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특히 아시아 10대 소녀들은 케이팝 뮤비에서 몸짓 하나하나까지 너무 큰 영향을 받는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