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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산’, 김은혜
1951년 전쟁 통에 태어났어요. 올해 제 나이가 칠순이에요. 경상남도 마산이 고향이고요. 7남매 중 딸로는 둘째, 딸 여섯에 오빠 하나. 마산의 딸 부잣집이었죠. 부모님은 당시로는 정말 특별하게도 연애결혼을 하신 분들이에요. 어머니는 지금은 경상대 간호학과로 바뀐 진주간호학교를 마치고 마산의 경남도립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아버지를 만나셨죠.
그래서인지 그렇게 부잣집도 아닌데 아들, 딸 구별 없이 차별 않고 다 공부를 시키셨어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도 아니고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는데, 굉장히 사람들을 좋아하셔서 늘 우리 집은 잔칫집 같았어요. 마산도 부산 못지않게 피난민이 많았어요. 상이용사가 집에 오건, 피난민이 집에 오건 늘 따뜻하게 쌀이며 고추장이며 다 퍼주셨어요.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이거였어요. “제일 못난 인간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인간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두 분 모두 제 삶의 첫 스승이었어요.
어머니는 올해 99세신데 지금도 보청기 없이 대화가 가능하고, 지팡이도 안 짚으세요. 오늘 아침에도 전화했는데, 이러시더라고요. “은혜야,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제가 평생 살면서 어머니한테 정말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어머니가 간호사를 그만두고 나서 우리 집이 시장에서 식품 빼고 다 파는 잡화점 같은 것을 했는데 주변 상인분들에게 정말 잘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시장 상인분들이 다 오셔서 많이 위로해주셨죠. 저도 어려서부터 저렇게 나누며 사는 거구나, 하고 배웠던 것 같아요.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4월 1일에 학교에 입학했는데, 저는 생일이 늦어서 다음 해에 입학해야 했지만 동네 또래들이 다 학교에 가니까 나도 보내달라고 막 떼써서 일곱 살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4학년 때 3·15 부정선거를 겪었죠. 어린애들도 어른들끼리 얘기하는 걸 듣게 되잖아요. 공무원, 이런 사람들이 정말 노골적으로, 공공연히 부정을 저지르는 게 다 보이니까 사람들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민심이 흉흉해졌어요. 그래서 3월 15일 선거 날 데모가 시작됐죠. 그때 오빠가 마산중학교, 큰언니가 마산여고에 다녔어요. 어니, 오빠만이 아니라 초등학생들도 데모에 나갔어요. 그때 본 거죠, 사람들이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저는 못 가봤지만 언니, 오빠는 김주열 시신이 떠올랐을 때 보러 갔어요. 그때는 경찰이 시위대에 총도 쐈거든요. 다행히 우리 가족 중에는 없었지만 주변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희 집이 창동이라고 마산의 중심가에 있었는데, 할머니가 창가에 솜이불을 쌓아놓고 기도하시던 것도 기억나요. 나중에 고등학교에 가서 당시 마산에서 데모했던 것, 3·15 부정선거에 대해 발표했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제 별명이 ‘미스 마산’이 되었죠.
그때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입시를 봐서 들어가야 했는데, 화폐 개혁이 있은 다음에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화폐 개혁을 했거든요 아버지가 여기저기 빌려줬던 돈을 못 받고 그러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어요. 1965년에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 부모님이 집안 형편상 서울 유학은 어렵다고 선생님에게 그랬어요. 그래도 일단 시험만이라도 보고 오라고, 담임선생님하고 다른 선생님들이 차비를 모아주셔서 서울로 가서 시험을 봤어요. 경기여고에 붙었는데, 어떤 목사님이 자기 딸들이 들어간 기숙사에 들어가게 해주셔서 마산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었죠.
여공들의
삶을 목격한 15일
외삼촌이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할 때 병문안을 한 번 갔는데, 저보고 피는 못 속인다고 그러시더라고요.(웃음) 어린 시절 마산에서의 경험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게 된 거 같아요.
제가 70학번이에요. 1970년 이화여대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시국강연회 같은 게 많았어요.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의 강연도 들으러 다니고 했는데, 그해 11월에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셨어요. 그 영향이 제일 컸어요. 그래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노동운동, 노동자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4년 내내 1학기만 학교가 열리고 2학기는 강제 휴교를 했어요. 박정희 정권이 데모를 못 하게 아예 학교 문을 걸어 잠근 거죠. 2학년 때부터 ‘새얼’이란 학내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우리 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과 같이 모임도 하고 대외 협력, 연대 사업을 담당했어요.
2학년 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모여 2박 3일 연합 엠티를 갔는데 그 엠티 제목이 ‘부활과 혁명’이었어요.(웃음)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 신철영은 서울대 공대그때는 공대가 태릉에 있었어요를 다니고 있었는데 저랑 비슷하게 노동운동, 노학연대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금방 가까워졌죠.
3학년 때는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서 친구들과 현장에 들어갔어요. 그때 산업화라는 게 일방적으로 노동자, 농민의 희생을 강요했고 그래서 노동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토론도 하다 보니 진짜 현장이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3학년 여름방학 때 선배 이름으로 위장취업을 했어요. 문래동에 양탄자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뻣뻣한 말털 뭉치를 쇠꼬챙이가 박힌 나무판에 맨손으로 쳐서 엉킨 것을 가지런히 풀어 일본에 수출하는 공장이었어요. 말털이 아주 뻣뻣한데 그걸 맨손으로 훌치니까 손이나 팔이 긁혀서 상처가 많이 났죠. 당시 커피 값이 50원이었는데 우리 일당이 135원이었어요. 우리가 묵었던 문래동 가겟집 2층 다락방의 월세는 5,000원이었고요.
우리는 원래 한 달 예정으로 현장에 들어갔지만 보름 만에 나왔어요. 저도 그랬지만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너무 고민이 커서 힘들어했거든요. 우리는 한 달만 하면 다시 여대생당시 여대생이라고 하면 여자들 중에서 매우 큰 기회를 얻은 집단인 거잖아요이 되는데, 공장에 있는 여공들은 초등학교를 막 졸업했거나 중학교에 다니다가 공장으로 와서 돈 벌어 시골집에 보내는 열세 살, 열네 살짜리 아이들이었어요. 우리 집이 부잣집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기회를 누리고 사는데 그런 이들을 보면서 내가 계속 대학을 다녀야 하나, 이런 고민이 생겼고, 우리끼리 토론한 뒤 일단 학교로 돌아가 선배들과 같이 얘기하기로 결정이 났던 것이죠.
저는 일단 학교에 남아서 학생운동, 그리고 노학연대를 계속해야 한다고 얘기가 되었어요. 3학년이 되면서 동아리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실천이 중요하다, 학교에 남아서 이화여대 학생운동을 책임져야 한다는 거였죠. 그때는 정말 열정적으로 학생운동을 했어요. 노동자들과 연대해서 손수건도 만들어 팔고, 볼펜도 팔고. 그리고 기독학생 총연맹이란 단체에서도 활동했는데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제가 겪은 그 보름 동안의 공장 체험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막 울먹이면서. 그 자리에 남편도 있었죠.
그때 박형규 목사님이 계시던 제일교회를 다녔는데 거기는 완전히 해방구 같은 곳이어서 노동자들과 모임도 하고 〈장렬한 화염〉이라는 연극도 올렸어요. 그때 민청학련 지도부에서 저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이화여대만이 아니라 여대생 총괄 책임을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거절했죠. 이미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혔고, 또 민청학련과 연결되면 제가 관여하는 현장도 너무 위험해질 것 같았거든요.
1973년에는 이화여대에서 제가 11월 28일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어요. 10월 유신에 저항하면서 박정희 정권 규탄, 구속 학생 석방, 민중 생존권 보장을 걸고 집회를 했는데 계획에 없이 교문 밖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이 가두시위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죠. 그때 김옥길 총장님이 학생들을 못 잡아가게 총장실에서 보호해주셔서 이틀인가를 총장실에서 농성도 했어요.
이 사건으로 숨어 다녀야 했는데 그다음 해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어요. 그때 김지하 선배가 잡혀갔는데 제가 지학순 주교님에게서 자금을 받아 전달해줬다고 한 거예요. 아마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제가 했다고 거짓말을 했을 거예요. 저는 공개된 사람이고, 지학순 주교님이 계신 원주교구를 드나들면서 주교님과 친분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제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났어요. 그 뒤로 경찰이 저를 잡으려고 친인척까지 찾아가고, 새벽같이 들이닥치고, 난리가 났죠. 졸지에 민청학련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니다가 13개월 만에 사건이 마무리되고 가족을 만날 수 있었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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