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중략)
존재의 의미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이자, 운반자로서의 로봇이다.”
이 말은 매우 비정하게 들릴 수 있으나, 어찌 보면 묘하게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소임을 다한 것이다.
물론, 존재의 의미라는 어려운 문제를 이렇게 쉽게 피해 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잘 알고 있듯이, 고대로부터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으며, 그 노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른 말로 풀어보자.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의 답이 가치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치 판단은 개인의 철학적·종교적인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철학과 종교가 아닌 과학은 이 질문에 과연 어떤 답을 내놓을까? 거칠게 말해서, 과학은 ‘왜why’가 아닌 ‘어떻게how’를 묻는다. 즉,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재미있는 것은 ‘어떻게’를 계속 묻다 보면, 점점 ‘왜’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어떻게 유전되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전자다. 그러고 나서 과학은 유전자가 개별 생명체의 형질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를 묻는다. 답은 DNA다. 그다음으로 과학은 DNA가 애초에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른바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이라고 불린다.
물론 우리는 아직 생명의 기원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생명의 기원이라는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떻게’라는 질문의 사슬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결국 무엇을 만나게 될까? 우리는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을 만나게 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파동wave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파동이면서 입자particle이다. 참고로, 이러한 현상을 전문적으로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이라고 부른다. 파동-입자 이중성과 같이 이상한 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나타나는 것일까?
지구가 멸망해도 사라지지 않을,
단 하나의 문장
노벨 물리학상에 빛나는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이 남긴 유명한 질문이 있다. “만약 어떤 커다란 재앙이 일어나, 모든 과학적 지식이 사라지고 단 한 문장만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가장 적은 낱말로 가장 커다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문장은 무엇일까?” 파인먼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파인먼은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이 문장은 우주에 무수히 다양한 물질이 존재할지라도 그러한 다양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사실이 있다고 말해준다. 바로 원자atom의 존재 말이다. 보편성universality이야말로 과학의 핵심 가치임을 감안할 때, 원자의 존재를 말해주는 위 문장은 지구가 멸망할 때 남겨야 할 단 하나의 문장으로 손색이 없다.
다만, 원자는 예상과 달리 존재하기 힘들다. 고대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물질은 절대로 깰 수 없는 순수한 결정체로 구성된다고 여겨졌는데, 바로 이 결정체가 원자다. 물론 현대적인 관점에서 원자는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원자란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태양계다.
먼저, 원자핵은 양성자proton와 중성자neutron로 이루어져 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는 약력weak force이라는 힘을 통해 가끔씩 방사성 붕괴를 겪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강력strong force이라는 힘에 의해 강하게 묶여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상황에서 원자핵은 내부 구조를 가지지 않는 하나의 점과 같은 입자로 생각할 수 있다.
전자들은 그런 원자핵 주위를 전자기력electromagnetic force이라는 힘에 이끌려 돌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주어진 원자의 물리화학적 성질은 그 안에 몇 개의 전자가 있으며, 그 전자들이 어떤 궤도orbit로 돌고 있는가에 따라 거의 대부분 결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물리화학적 성질이 결정된 100여 개 남짓의 원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결합해 무궁무진한 물질 상태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원자에 관한 이 그럴듯한 아이디어에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하나 숨어 있다. 즉, 원자 속의 전자가 정말 태양계의 행성처럼 원자핵 주위를 돈다면, 전자는 머지않아 원자핵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는 마치 인공위성이 공기와의 마찰로 인해 결국 지구로 떨어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전자는 인공위성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원자 속 전자는 아주 빠르게 회전하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가 전자의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를 급속도로 소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원자 속 전자는 아주 강력한 안테나나 다름없다.
이렇게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전자는 원자핵 속으로 얼마나 빨리 떨어질까? 놀라지 마시라.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 및 전자기학electromagnetism에 기반한 계산에 따르면, 전자는 약 10피코초picosecond, 즉 1,000억 분의 1초 만에 원자핵으로 떨어진다. 대재앙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물론이고, 우주도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원자를 구할 수 있을까?
답은 바로, 앞서 언급한 파동-입자 이중성이다. 양자역학은 전자가 어떻게 원자 안에서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궤도’를 돌 수 있는지 알려준다. 아니, 사실 전자는 궤도를 돌지 않는다. 궤도는 순전히 고전역학적인 개념이다. 실제 전자는 파동처럼 공간에 퍼져서 진동한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이러한 전자의 파동이 공명resonance을 일으킬 때 원자가 안정적인 상태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해준다. 비유적으로, 전자의 파동은 전자가 마치 구름처럼 원자핵 주변에 퍼져 출렁거리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전자의 구름이 공명을 일으키면 원자가 안정화되는 것이다. 참고로, 실제 물리학자들도 때때로 전자의 파동을 ‘전자 구름electron cloud’이라고 부른다.
잠깐, 그런데 공명이란 무엇인가? 공명의 한 가지 예로, 유리병 입구에 입술을 대고 적절하게 소리를 내면 유리병 전체가 흔들리며 소리가 증폭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각각의 유리병마다 ‘고유 진동수natural frequency’라고 불리는 특정한 진동수가 존재한다. 따라서 공명이란 유리병 입구로 흘러 들어간 소리의 진동수가 유리병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면 유리병이 크게 흔들리는 현상이다. 참고로, 공명을 일으키는 소리, 즉 파동을 ‘정상파standing wave’라고 부른다.
정리하면, 원자란 원자핵과 전자가 만들어 내는 공명 현상이다. 하나의 원자 속에 여러 개의 전자들이 들어 있다면, 모든 전자가 협동하며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원자는 안정화된다.
좋다. 모든 것이 파동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만, 원자를 구할 수 있다고 하니 일단 받아들이자. 전자의 파동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름처럼 퍼져서 출렁거리는 어떤 것으로 상상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갈 수는 없는데, 전자의 파동이 실제로는 훨씬 더 이상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 만큼 이상하지만
놀랍도록 아름다운
양자역학은 믿기 힘들 만큼 이상하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것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해, 입자는 그 자체로 점과 같지만 그것의 위치는 파동처럼 공간에 퍼져 있다. 이러한 파동을 기술하는 함수는 ‘파동 함수wave function’라고 한다.
파동 함수는 입자가 주어진 위치에 존재할 확률을 알려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확률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언뜻, 이는 양자역학의 한계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한계 덕분에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우리 우주가 놀랍도록 아름다워진다.
어떻게? 양자역학이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놀랍게도 파동 함수 자체가 확률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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