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쏟아지는 부동산 대책,
전문가도 당황하다
좌파정권이라
집값이 올랐을까
좌파정권만 들어서면 부동산은 죽을 쑨다.
이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집값 못 잡는 것이, 노무현 정부 때와 똑 닮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집값에 관해서 좌파정부는 지지리도 운이 없다. 운이 없다는 말에 태클을 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에 대한 짧은 역사를 정리해본다. 부동산 정책 흐름을 다루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은 아니니, 19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만 짧게 훑도록 한다.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채상욱 애널리스트가 쓴 《대한민국 부동산 지난 10년 앞으로 10년》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과거 10년간의 부동산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가장 경기가 불탔던 시기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의 3년이다. 이 시기는 3저 호황 시기라 불린다. 금리는 낮았고, 달러도 쌌다. 기름값도 저렴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국내외 상황이 너무나 좋았다. 1980년대 초반 내내 적자였던 경상수지가 1986년부터 흑자가 되었다. 경제도 연간 10퍼센트 이상 성장했다.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의 3저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원래 경제는 그렇게 계속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수출이 잘되자 시중에는 돈이 넘쳐났다. 자연스레 부동산으로도 돈이 흘러들어갔다. 일자리는 대도시로 집중되었고, 일자리를 좇아 사람들도 이동했다. 대도시에는 돈과 일자리, 사람이 넘쳤다. 이런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부족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몰려드는 인구를 위한 ‘주택’이었다. 1987년 주택보급률은 7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국 평균치다.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6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인구가 많아지니 주택 수요가 증가했다. 집값도 높아졌다. 게다가 경제 호황으로 넘치는 돈 때문에 부동산 시장은 활활 타올랐다. 특히 아파트에 대한 선호는 하늘을 찔렀다. 가구의 소득이 상승하면서 질 좋은 주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결과다. 아파트 가격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집값 상승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때 정부가 신도시 정책을 발표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그 유명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1998이다. 수도권에 90만 호, 지방에 110만 호를 짓는 계획이다. 당시 주택 200만 호 공급이 얼마나 황당한 계획이었는지 감을 잡기 힘들 수도 있겠다. 1980년대 말 전국에 있는 모든 주택의 수는 700만 호 정도였다.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은 전국 주택수를 5년 만에 30퍼센트 증가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당시 한 가구당 평균 가구원수가 3.7명 정도였다. 그러니 200만 호면 무려 74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인구의 17퍼센트 정도―당시 전국 인구는 4,300만 명―를 수용할 수 있는 슈퍼 사이즈 계획이었다)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까울 정도였다.
주택 200만 호 건설은 1987년 대선 당시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의 선거 공약이었다. 선거 당시 김보근 건설부 주택국장이 민정당 전문위원이었다고 한다. 건설부 과장이었던 분의 회고를 들어보자.
전문위원으로 파견된 김보근 씨는 원래 150만 호를 주장했다. 그런데 당무위원회에서 “100만 호나 200만 호처럼 딱 떨어져야지 어중간하게 150만 호가 뭐냐”라면서 200만 호로 바꾸어버렸다. 김 전문위원은 당시 능력으로는 5년간 200만 호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노태우 후보가 “선거공약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며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200만 호로 낙착되었다.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의 1기 신도시에 주택 30만 호를 공급하겠다고 발표되었다이것은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에 포함된다. 그래도 집값은 잡히지 않았다. 민심이 이탈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집값 폭등으로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두려워했다. 전세가는 집값보다 더 크게 뛰었다. 1989년 겨울12월 30일에는 주택임대차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또한 토지공개념을 담은 3개의 부동산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여전히 집값은 잡히지 않았다. 1990년 봄, 천호동 반지하 4평에 세 들어 살던 네 가족이 전셋돈을 마련하지 못해 동반자살했다. 40대 가장은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이후에도 세입자 17명의 자살이 이어졌다.
1988년 5월: 200만 호 주택 건설 추진계획 발표
1989년 12월: 주택임대차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개정안 국회 통과
1989년 12월: 토지공개념을 담은 3개 부동산 법안토지초과이득세법, 택지소유상한법, 개발이익환수법 국회 통과참고로 토지초과이득세법은 1994년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택지소유상한법은 1999년 위헌 판정을 받아 사장되었다.
정부는 주택 공급에 총력전을 폈다. 집값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1기 신도시 입주가 시작된 1991년부터다. 표 1을 보자. 1991년에 집값이 고꾸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표 1은 ‘정부정책’과 ‘집값’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십 번을 들여다볼 그림이다. 지금 당장은 1990년대 초반부터, 그러니까 대규모 입주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집값이 꺾였다는 것만 확인해보자.
1990년대 내내
인기가 없었던 부동산
1991년은 주택가격이 안정화된 역사적 분기점 중 하나다. 1990년대 내내 집값은 매우 안정된 추세를 보였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200만 호를 훌쩍 넘는 주택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이후 5년간1988년부터 1992년까지 전국에 공급된 주택은 모두 270만 호 정도다. 그다음 5년간1993년부터 1997년까지에도 주택이 310만 호 정도 공급되었다. 1990년대는 ‘공격적인 주택 공급의 시대’였고, 단군 이래 가장 많은 주택이 보급된 시기였다. 이렇게 주택을 쏟아붓는데 주택가격이 안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공급 폭탄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뛰었다면, 아마 우리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불가사의로 남았을 것이다.
주택가격이 출렁인 것은 1997년 말에 발생한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이하면서다. 1998년 한 해에만 집값은 20퍼센트 정도 폭락했다. 이때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는데 집값이 20퍼센트 정도만 내려갔다고? 지난 수년간 100퍼센트의 집값 폭등을 목도한 사람은 20퍼센트를 ‘폭락’으로 부를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당시 20퍼센트 하락은 꽤 큰 충격이었다. 생각해보자. 3기 신도시 입주가 시작된 1991년에 집값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이후 8년 동안의 집값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아 다시 한 번 크게 떨어졌다. 물가는 계속 올랐는데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엄청난 ‘마이너스’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IMF 시기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집값은 앞으로 20년간 쭉 오르기만 할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나를 사기꾼으로 취급할 것이다. 당시 집값이 오르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기 좋은 집을 골라 전세로 옮겨 다니는 게 이득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았다.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겨, 목돈을 은행에 넣고 이자 받는 게 발 빠른 이들의 ‘슬기로운 재테크’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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