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케이크 더하기,
자존감 빼기
굶기의 미끼는, 그 불가해하면서도 유혹적인 낚싯바늘은, 위안이었다. 나를 인간의 갈망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온갖 위험이 가득한 세계에서 끄집어내어 그보다 더 높은 곳에, 고요함의 내밀한 왕국에 데려다놓는 듯한, 그 안전함과 억제가 주는 온화한 위안.
이런 초월적 위안의 감각이 즉각 생겨났던 것은 아니며, 그런 위안의 상태에는 그 어떤 행복한 느낌도, 심지어 오래 지속되는 느낌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굶기는 고통스럽고 인정사정없는 경험이자 욱신거릴 정도로 따분한 경험이며, 삶 전체가 단 하나의 감각육체적 허기과 단 하나의 집착음식으로 졸아드는 일이다. 그러나 내 20대 중반에 걸쳐 지속되었던 그 시기를 돌이켜보면서 그토록 기괴한 집착이 지닌 수많은 의미와 의도를 이해해보려 노력할 때, 내게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바로 그 차분함, 대양처럼 광대하면서도 도저히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던, 어떤 불안에서 해방된 것 같았던 느낌이다. 나는 수년간 매일 같은 음식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같은 시간에 먹었다. 음식에 관해 생각하고, 음식에 저항하고, 다른 사람들이 음식과 맺는 관계를 관찰하고, 내가 정해둔 티끌만 한 양의 음식에 탐닉하는 시간을 기대하는 등 이 모든 노력에 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쏟았다. 이렇게 협소하고 구체적이며 강박적인 엄격함은 내게 비할 데 없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하나의 관심사, 하나의 감정뿐 나머지 모든 것은 배경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
음식 중독, 강박적 쇼핑, 되는대로의 섹스 등 욕구에 얽힌 장애는 여성 본인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상징과 은유로써 표현해주는 일종의 기호학적 명쾌함을 지니고 있으며, 나도 거식증의 의미를 누구 못지않게 잘 해석할 수 있다. 거식증은 여성의 신체에 대해 우리 문화가 갖고 있는 수척하고 앙상한 몸의 이미지들에 대한 한 가지 반응으로, 그러한 이상에 순종하는 동시에 그것을 조롱하며, 섹슈얼리티의 모든 부수적 신호들, 즉 젖가슴과 엉덩이와 궁둥이를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현란한 캐리커처, 살과 뼈로 된 잔인한 만화를 남겨둔다. 거식증은 일종의 소리 없는 항거이며, 성인 여성의 몸을 입고 사는 경험에 대한 심한 불편함을 표현하는 단식투쟁이다. 거식증은 음식과 체중에 대한 집착을 거꾸로 뒤집고, 그 집착의 에너지를 음식의 준비와 제공과 소화가 아니라 음식 및 음식이 대표하는 모든 것, 즉 풍요와 풍성함과 돌봄을 회피하는 일로 돌림으로써 음식과 체중에 대한 여성의 전통적인 몰두를 무력화하는 한 방법이다. 거식증은 이러한 것이고, 거식증은 저러한 것이다… 그러한 상징적 표현에 관해서는 많은 책들이 쓰였고, 그 모든 책에는 진실이 담겨 있으며, 그 진실들은 기이하게도 위안을 준다. 그 진실들은 식사장애가 미국 여성의 셋째로 흔한 만성질병인 이유와 젊은 여성 중 15퍼센트가 음식과 먹는 일에 매우 병적인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이유, 식사장애의 발병률이 1950년대부터 5년마다 36퍼센트씩 증가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 수수께끼를 해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그 진실들은 어느 정도 희망도 준다. 자신에게 가하는 유난히 파괴적인 이 잔혹 행위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행위를 멈출 방법도 어쩌면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나 역시 위로가 되는 설명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20년이란 세월이 주는 냉철한 초연함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여기서 문화 논평을 좀 하고 저기서 은유 분석을 좀 하는 식으로 명쾌한 비평을 제시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런 식의 설명을 이어가다보면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배경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손에 잘 잡히지도 않고 완강하며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어서 말로 표현하기가 몹시 어렵다. 바로 그것이 거식증의 핵심, 거식증의 기저에 깔린 충동이다. 그것은 20년 전의 나를 거식증에 그렇게 큰 유혹을 느끼게 만들고 거식증이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을 거라고 느끼게 한 감각이다. 또한 너무나 많은 여자들에게 식욕이라는 중심적 경험에 형태와 특성을 부여하는 감각으로, 우리가 허기의 식탁으로 가져가는 최초의 감정, 바로 불안이며 압도감이다.
여자의 허기를 둘러싼 마음의 동요에는 특유의 윙윙거리는 단조로운 소리가 난다. ‘하라’ ‘하지 마라’ ‘할 수 없다’ ‘원한다’라는 낮게 깔리며 반복되는 소리. 이 소리는 너무 고질적이고 익숙해서 여자들의 상투적인 배경음악이 되어버렸고, 자신이 그 소리를 내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때조차 없는 소리처럼 무시해버리거나 아예 들리지 않게 걸려버리기 쉽다. 지난봄 여자들 몇 명이 우리 집 거실에 모여 식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근처 어느 학교의 교사와 행정 직원이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체중, 음식, 허기를 관리하는 이 모든 일이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체중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한 사람이 말했다. “맞아요. 나도 그래요.”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루하루 뭘 먹을지 크게 고민하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그냥 먹고 싶은 걸 먹죠.”
스물두 살부터 마흔 한 살 사이의 쾌활하고 매력적인 이 사람들이 음식에 관한 문제에서 자신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생각을 어찌나 확고히 고수하는지, 그들의 설명 저변에 미묘한 경고의 낌새가 깔려 있지 않았다면 나도 덩달아 그들의 말을 믿을 뻔했다. 그 경고는 규칙, 무릎반사만큼 깊이 배어 있는 태도, 정당한 보상에 대한 여성 특유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으며, 바로 그 경고가 이 동요의 윙윙거림, 명령과 억제의 불안한 짤랑거림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체중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이는 헬스장에 다녀온 날에만 디저트를 먹거나 저녁을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운동을 안 한 날은 당연히 디저트도 안 먹는다. 그의 말에 동의했던맞아요, 나도 그래요 이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렇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운동을 안 하면 음식이 역겨워지기 시작하고, 그러면 먹는 양을 줄이려고 노력해요.” 또 한 사람은 자기는 “평범하게” 먹는다면서도 매번, 식사 때마다 예외 없이 최소한 한 입은 남기는 걸 규칙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그냥 먹고 싶은 걸 먹는다”던 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 일터에 케이크를 가져오면 나는 작은 조각 하나만 먹는데, 겉에 발린 크림은 안 먹어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죠. 그냥 크림만 걷어내면 되니까요.”
작은 케이크 조각 하나, 크림은 빼고. 헬스장에서 45분 운동하기. 이런 것이 바로 그 규칙들이며, 경계와 자제라는 주제의 변주들이다. 나는 여자들이 이 주제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을 평생 보아왔고, 나 역시 본능적으로 거기 맞춰 춤을 춰왔으며, 아직도 그 춤을 추지 않으려면 애써 그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헬스클럽 탈의실에 들어가면 나는 즉각 주위 사람을 살펴보려는 충동을, 타인에 비추어 자신을 측정하려는 자동 반사적 충동을 느낀다. 저 사람은 허벅지가 멋지고, 이 사람은 체중이 늘었고, 누구는 날씬하고, 누구는 뚱뚱한데, 나는 그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일까? 나는 대화의 토막들을 엿듣고, 무의식적으로 내뱉어져 자제를 추켜세우는 후한 칭찬의 한마디자기 끝내주게 근사해. 살 빠졌나 봐?나 비난하는 평가의 속삭임저 여자 꼴이 엉망이네. 체중이 는 걸까?이 들려오면 자동으로 고개를 돌려 누가 끝내주는지, 누가 엉망인지 확인하게 된다. 여자들 여럿이 모여 레스토랑에 갈 때면 섭취량과 자제력의 정도를 드러내고 비교하고 지적하는 그리 은밀하지도 않은 집단적 감시 활동은자기는 뭐 먹을 거야? 겨우 그것만 먹겠다고? 샐러드만? 아이 참, 왜 그래 부디 건너뛰고 무사히 점심을 주문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한 행동에는 남과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는 집요한 자의식이 숨어 있는 한편,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고 그걸 어길 때는 자신을 깎아내리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존재한다. 남들은 모두 샐러드를 주문할 때 치즈 버거를 주문하여 대열에서 이탈한 이가 이렇게 말한다. 난 진짜 돼지인가 봐.
안 돼, 하지 마, 에라, 모르겠다. 칼로리와 지방에 관한 이 지루한 수다와 징징거림, 표피에 대한 이 얄팍한 집착은 대부분 여자들의 허영이라는 말로 일축되고는 하지만, 내게는 이런 일들이 통렬하게 느껴지고, 은근하지만 고질적인 고통으로 여겨지며 꽤 많은 속내를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성별에 관한 문화적 신화들 중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하나가 여자들은 수학을 못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수학에 자신감이 없고 시공간 지각 능력이 변변찮으며 아무튼 숫자를 다루는 데 남자들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설 말이다. 이 이론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널리 도전받아왔고, 여자들이 대수나 미적분을 처리하는 데 신경학적으로 부적합하다고 말할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다른 근거에서 이 신화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여자들은 실제로 수학에 아주 뛰어나다. 단지 그 수학이 그들만의 특수한 종류의 수학, 즉 욕망들을 서로 낱낱이 떼어내 분리하고 저울질하고 균형을 맞추고 흥정하고 평가하는 복잡 미묘하고 사적인 수학인 것뿐이다. 이 욕망의 수학은, 욕구는 잘 봐줘도 위험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마음껏 만끽하려면 사거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바탕에 깐, 자제와 감시의 체계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규칙과 경고가 생겨난다. 점심 메뉴판을 살펴보거나 치즈 버거를 주문하거나 크림 케이크를 그대로 먹기 전에 먼저, 마음의 계산기를 꺼내서 예산을 잘 살펴보라는 것.
왜 안 된다는 걸까? 얼마 전 레스토랑에서 디저트를 주문할지 말지 망설이는 이에게 나는 이 질문을 던졌다.
단박에 대답이 돌아왔다. “역겨운 느낌이 들 테니까.”
왜 역겨울까?
“내가 뚱뚱하게 느껴질 테니까.”
자신이 뚱뚱하게 느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내가 뚱뚱하게 느껴지면 나 자신을 미워하게 돼. 내가 추하고 통제력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하나도 안 섹시하게 느껴지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그럼 디저트를 안 먹고 버틴다면?
“박탈감은 약간 느끼겠지만 나 자신이 가상하다는 느낌도 들 거야.”
그러니까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지.”
한낱 케이크 한 조각을 두고 벌어지는 이런 거창한 ― 500칼로리를 더하고 안녕과 매력과 자존감을 빼는 ― 흥정의 배후에 자리한 감정들은 그러나 허영심이나 경박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 30초간의 대화에는 그 수학적 원칙들 전체가, 허기에 대한 한 여성의 가장 근본적인 접근법을 결정하는 방정식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 ― 그 충동들, 그 필요들, 그 크기들 ― 에 대한 통제다. 통제에 실패한다는 건 곧 아름다움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뜻이고, 아름다움을 잃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 곧 욕망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뜻이며, 이는 곧 섹슈얼리티와 사랑과 자존감에 대한 자격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고, 먹고 싶은 마음과 날씬해지고 싶은 마음이 서로 부딪치며, 마음껏 누리고 싶은 욕망과 절제해야 한다는 명령이 대립한다. 음식이 여자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방정식에서 식욕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불안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건 일종의 부담이며 위험이다. 허기에 굴복하는 일은 특정 조건하에서 허용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 그 허용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야earn 하며, 그러려면 감시하고monitor 통제해야control 한다. 그리하여 e=mc2.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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