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건 참아도 이건 못 참지!”
행복한 나라는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나라는 서로 닮았다. 모두 불평등이 심각하다. 한국의 가계소득 격차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6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다. 즉, 선진 자본주의 국가 중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이 큰 문제’라고 걱정하고 분노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곰곰 듣다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정말 걱정하고 분노하는 대상이 ‘불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이 책은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보고서다.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그 심성의 기저에 도사린 것이 능력주의meritocracy다. 능력주의는 본래 능력에 따른 지배merit/cracy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응분desert의 보상체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은 당연시되곤 한다. 가령 능력이 열등한 이가 능력이 우월한 이와 같은 몫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비효율이자 부정의한 사태로 강하게 비난받는다.
‘개인의 능력 차이는 명백하다. 따라서 불평등은 자연스럽다.’ 이런 논리가 당연하게 들리는가? 축하한다. 당신은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어엿한 능력주의자다. 고백컨대 이 글을 쓰는 사람도 한때 투철한 ‘꼬마 능력주의자’였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고 아무 의심 없이 그걸 진리로 믿었다. 능력주의는 직관에 호소한다.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편적 정의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이다. 과연 그게 옳아서 자연스러운 걸까? 그렇지 않다.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능력주의는 정의를 가장한 부정의, 즉 사이비 정의다.
능력주의는 왜 나쁜가? 사람들로 하여금 불평등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당연시함으로써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민주주의도 악화한다. 사회학자 신광영은 “불평등의 심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지적하고, 그 메커니즘에 대해 “경제적 차원의 변화가 곧바로 정치적 차원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능력주의의 핵심 기능은 불평등이라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다. 그 결과 불평등으로 가야 할 문제의식은 모두 불공정 논란에 빨려 들어가고 만다. 이 책의 목표는 그러한 사태가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 밝히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의 능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명백하지 않으며 그 차이에 대한 현재의 보상체계도 대부분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상속이나 세습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며 불공정하고 부정의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둘 다 불공정하고 부정의하다. 능력주의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것이 편견에 치우친 고대 철학과 오류로 판명된 경제학 이론 등이 무비판적으로 뒤섞인 채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임이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6장, 9장, 10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면 일각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제대로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즉 능력주의가 왜곡되고 타락해서 문제이지 능력주의의 이상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능력주의 관련 논의들 중 상당수는 능력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사회 조건에 대한 비판이다. 예컨대 학벌사회와 능력사회를 대립구도로 설정한 다음 “학벌사회를 극복하고 능력주의 사회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한편 능력주의가 경쟁적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조장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하면서도 세습신분제보다는 낫기 때문에 능력주의 자체는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이런 두 입장, 즉 능력주의를 바람직한 가치로 제시하는 옹호론, 그리고 능력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능력주의 이념에 대한 긍정이 결합한 절충론이 공유하는 것은 ‘이상적 능력주의’에 대한 동의다. 다시 말해 이 두 관점들은 모두 이상적 능력주의라는 잣대를 통해 세습신분제적 현실을 비판하거나 혹은 현실의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세습신분제뿐 아니라, 불합리한 특권을 ‘공정’으로 호도하는 일종의 ‘위장된 신분제’로서 현실적 능력주의realistic meritocracy, 그리고 세습신분제적 요소가 제거된 것으로 가정된 이상적 능력주의ideal meritocracy가 모두 문제라고 본다. 세습 신분제든 현실적 능력주의든 이상적 능력주의든 불평등 자체를 부당하게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또한 현실적 능력주의와 이상적 능력주의는 ‘능력’을 분배의 유일하거나 지배적인 규칙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물론 ‘동일 가치 노동 동일 임금’과 같은 비례적 형평성은 어떤 영역에서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한 사회의 유일하거나 지배적인 분배 기준이 된다면 심각한 사회적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불평등 심화가 다시 민주주의의 악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능력주의는 민주사회가 추구해야 할 지배적 정의 원칙으로 적합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존투쟁에 시달린다. 이 결사적 전쟁에서 ‘잡아먹히는 쪽’이 아니라 ‘잡아먹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 한국인들은 과도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스펙’과 인맥을 쌓는다. 이 격렬한 생존 본능 혹은 투쟁심,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위 상승 욕구, ‘빨리빨리’ 문화 같은 현대 한국인의 집단 심성은 능력주의와 밀접히 관련돼있다. 능력주의는 오랫동안 한국인을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였다. 이는 능력주의가 과거의 낡은 유산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능력주의는 근대를 ‘완성’하지 못한 ‘전근대 사회’, 또는 선진국을 추격하는 개발도상국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앞서 나간 국가들이 공히 겪고 있는 문제다. 한국은 자본주의-능력주의 체계의 최첨단에 선 사회이다. 그만큼 능력주의의 폐해 역시 극심하다.
지위경쟁을 자극하는 능력주의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고도 경제성장 시기에 그랬다. 절대다수가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면 조금 더 잘살게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학력별 임금격차는 원래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컸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차이가 급격히 줄어든 적이 있다. 당시 지표를 보면 상고나 공고를 나온 노동자가 중산층으로 편입될 여지가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돌아 보면 예외적인 시기였다. 노동조합 숫자가 유례없이 늘어난 때 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이 본격화하며 그 추세는 꺾이고 만다. 장구한 불평등 사회가 조금씩 평등 사회로 전환하려는 찰나에 흐름이 끊겨버린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구조가 점점 고착하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능력주의의 폐해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의 입을 찍소리 못하게 틀어막는 철퇴가 됐다.
최서원(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 그리고 조국 씨 딸 조민 씨의 입시 비리와 특혜 논란은 많은 시민의 공분을 샀다. 분노 자체는 정당했다. 그런데 ‘공정’을 내세워 이들을 비판했던 많은 이들은 스스로 어떤 특혜나 우대 없이 공정한 경쟁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유라 씨 사건이 한창일 때, 한 이화 여대 학생이 정유라 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대자보를 쓴 적이 있었다.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라는 제목의 그 글에서 글쓴이는 “우리가 중앙도서관에서 밤을 샐 때 너는 어디서 뭘 했을까?”라고 물으면서, “네 덕분에 그동안의 내 노력들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실감이 난다”라고 적었다.
정유라 씨가 실제로 승마에 얼마나 재능이 있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일단 접어두자. 그 대자보의 진정한 의미는 ‘불공정을 향한 통쾌한 일침’에 있는 게 아니라 ‘공정성’이 얼마나 주관적일 수 있는지 투명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글쓴이는 자신의 현재가 온전히 자기 재능과 노력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며 부모님의 원조나 환경적 혜택은 일체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과연 그런가?
유명한 미식축구 코치인 배리 스위처Barry Switzer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안다.Some people are born on third base and go through life thinking they hit a triple”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를테면 정유라 씨는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경기 시작부터 5점을 벌어놓은 경우일지 모른다. 조국 씨의 딸 조민 씨 역시 최소한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조 씨처럼 대학교수 부모님을 통해 소위 ‘스펙 품앗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마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대자보를 쓴 이대 학생은 어떨까. 그는 3루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적어도 ‘1루에서 태어난 사람’ 정도는 된다. 즉, 그 대자보 글쓴이는 ‘1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1루타를 친 줄 아는 사람’일 수 있다. 글쓴이가 타고난 학습 능력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등록금이 비싼 대학교 중 하나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 순전히 본인의 공적이나 기여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개인적 자질과 가정환경은 전적으로 우연히, 그러나 너무나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조건이다. 불법이나 편법이 아니라 해서 인생 출발선의 불공정이 자동으로 공정해지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1루를 밟지 못한 사람, 아예 야구 경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불우한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교 입학은 꿈도 꾸지 못한다. 심지어 사회적 성취를 위한 ‘노력’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로 치부되곤 하는 노력이나 성취욕구조차 실은 성장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공정’을 놓고 벌어진 이 모든 떠들썩한 소란이 그저 공허하게 느껴질 것이다. 명문대 간판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어차피 선택받은 소수의,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기 때문이다. 입시 비리에 ‘물타기’를 하거나 ‘불행 경쟁’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공정성, 정의라는 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에서 유독 정도가 심하긴 해도, 능력주의는 한국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능력주의 이념과 제도, 문화가 나타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6조는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있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능력주의와 일반적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 쓴 글에서 능력주의를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장치”이자 “끝없는 축적의 불합리성을 감추는 가면”이라 표현했다. 자본주의 등장 이전에도 능력주의적 현상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 이후에 능력주의가 다른 점은 그것이 “하나의 공식적인 덕목으로서 천명되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이다. 보편적 교육권을 명시하고 있지만 “능력에 따라”라는 단서가 달려있다. 이 조항을 보면 능력주의가 교육과 관련해 한국 사회를 규율하는 핵심 가치임을 알 수 있다. 교육 분야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능력주의는 한국인의 일상 전체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꿀 수 있고 바꿔야 마땅한 사회 제도·법·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피해자 탓하기’와 ‘책임의 개인화’로 귀결시켜 ‘결국 네가 공부 안 해서 그런 거잖아’라는 식의 말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일”은 흔하게 목격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한국 사회의 약자들이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능력주의는 정의를 가장하기 때문에 노골적 부정의인 세습 신분제보다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정치평론가 크리스토퍼 헤이즈Christopher Hayes는 “능력주의 사회는 빈부격차에 가장 둔감한 사회일 수 있다”며 “능력주의의 철의 법칙The Iron Law of Meritocracy”를 제기한다. “부자는 자기 능력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하고 빈자는 자기 능력의 한계로 빈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당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을 ‘공정한 경쟁’인 것처럼 가정한다는 점에서 기득권을 옹호하는 효과가 크고, 이에 따라 오히려 명시적으로 비난받는 세습 신분제보다 큰 폐단을 낳을 수 있다.
특히 최근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 현상과 더불어 자주 관찰되는 현상은 상대적 약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분 구별 전쟁’이다. 인용한 기사는 한국에서 약자가 약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능력주의를 적용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서울교통공사 소속 무기 계약직들이 정규직 직원들로부터 원색적 비난과 인신공격에 시달린 끝에 급기야 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서울시가 약속한 정규직 전환정책이 구체적 계획 없이 표류하면서 지난달 무기 계약직 한 명이 목숨을 끊는 등 극단적인 노노 갈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중략) 교통공사 내부 게시망에서부터 무기 계약직을 향한 정규직의 온갖 욕설 글과 비하 발언을 쉽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정의구현, 무임승차 놈들아”, “무임승차 무기 업무직들은 조져야 된다”는 등의 격한 발언은 양호한 편이다. 무기 계약직을 “빨갱이”나 “통합진보당 잔존 세력”으로 지칭하면서 “평양교통공사로 꺼지라”며 뜬금없는 이념 공세를 펼치는 글도 보인다. “수십 년간 메트로와 함께한 노숙자랑 잡상인은 편입 안 시키느냐”라거나 “폐급을 폐급이라고 부르지 못하느냐” 등의 인신공격성 표현도 상당하다.
2017년 12월 31일 서울교통공사 노사가 무기 계약직 전원을 정규직 전환하기로 최종 합의하자,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디 ‘베○○○’은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전환 미쳤네요”라는 게시물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규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구직자는 외면하고 어중이떠중이 뒷문으로 채용된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되고. 이게 적폐 청산인지 적폐 양산인지 도대체 누가 적폐인지. 서울시장 실적을 위해 적폐를 양산하는 것인 양 한심하네요.” 그 글에 수많은 동의 댓글이 달렸다.
“미친 거죠. 이건 평등이 아니라 특권입니다.”(아이디 ‘처○○○’)
“매점 아줌마도 대졸 공채로 입사해서 머리 아픈 일하는 직원들하고 똑같은 급여 받는 거죠. 공산주의스러운 발상이죠.” (아이디 ‘o○○○’)
“심하게 말하면 출신 성분 자체가 다른데 같은 급여 주는 거임. 무기 계약이랑 공채가 급여체계와 일이 다른 건 당연한데 이걸 합치면 분위기 개판에 구직자들 허탈감도 쩔죠.” (아이디 ‘사○○○’)
저런 발언들은 특별히 예외적이거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의 단골 메뉴는 ‘무임승차론’과 ‘역차별론’이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정규직은 힘들게 대학 가서 어렵게 정규직 공채시험을 통과한 ‘능력 있는 사람들’인데 반해 비정규직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므로 설사 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처우를 차별하는 게 당연하다는 게 이들 생각이다. 그러므로 업무 경력이 오래되고 숙련됐다는 이유 따위로 정규직이 되면 그건 ‘무임승차’이며 능력자·노력가를 억울한 피해자로 만드는 ‘역차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과연 ‘공정’이란 무엇인가? 시험 보고 입직한 사람만 정규직의 지위를 누리고,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그 일에 숙달됐어도 시험을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공정’한가?
특정 시험 합격자에게만 정규직 신분을 부여하는 것은 임의적 규칙일 뿐이다. 더구나 그 규칙은 불공정하고 부정의하다. 업무에 대한 실제 기여가 아닌 입직 당시의 시험 성적에 따라 급여나 복지 등에서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지대추구rent seeking, 즉 생산적 기여 없이 소유권만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와 다름 없다. 본래 비정규직은 고용불안정을 감수하는 대신 임금을 더 받아야 하는 고용 유형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사실상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임금도 적게 주고 해고도 마음대로 해왔다. 이런 부정의하고 비생산적인 규칙을 만든 근본 책임은 국가에 있다. 그런데 왜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난하는가?
능력주의가 사회의 철칙으로 맹신되고 있기에 그것은 ‘혐오놀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기도 했다. 능력주의를 과도하게 내면화한 이들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학자 오찬호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으며,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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