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조선사람의
살림 인식
장가와 처가살이의 나라
‘조선 시대 여자’ 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도婦道를 지키며 인내하고 순종한 현모양처를 떠올리기 일쑤지만, 이러한 생각은 5천 년 한국사에서 불과 150년도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에 형성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부터 시작해서 특히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모습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남녀 공존의 시대였다. 기존의 여성사 연구자들은, 당시에도 여자는 정치권력에서 배제되었으므로 전통시대는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요, 여성사를 정치권력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남자 중심적인 시각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가화만사성’이라는 오래된 문구를 굳이 주워섬기지 않더라도, 전통시대는 국가보다는 집안이 더 중요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정확한 남녀관계, 그리고 전통시대 여성상을 알기 위해서는 집안을 둘러싼 실질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전통시대 집안은 오늘날의 중소기업체와 맞먹을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갖춘 사회였다. 집안에는 조부모와 부모, 형제자매, 사촌, 노비 등 수십 수백 명이 어울려 살았다. 의식주 등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을 집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했으며, 교육이나 복지, 의료, 종교도 거의 집안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사람들에게 집안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것이었고, 집안일도 엄연한 사회 활동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가정은 사적 공간에 불과하지만, 전통시대 집안은 이처럼 사적 공간이자 공적 공간이었다.
전통시대에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대로 눌러사는 ‘장가’와 ’처가살이’ 풍속이 있었다. 딸이 남편과 함께 자기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자녀도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에 따라 조선 전기와 중기까지도 재산을 아들 딸 차별 없이 균등하게 나눠 주는 균분상속이 이루어졌고. 조상의 제사도 자녀들이 서로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를 했다. 남녀의 권리와 의무가 서로 동등했던 셈이다. 나아가 여자의 바깥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학문과 예술 활동도 결혼 이후 단절되지 않고 평생에 걸쳐 계속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에 설씨부인, 조선 중기에 신사임당, 송덕봉,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 이옥봉 등 명실상부한 여자 예술가들이 계속 출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연히 이 시기엔 집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삼봉집』 三峯集에 당시의 세태를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는 남자가 처가에 가서 살기 때문에, 식견 없는 부인들이 부모의 세력을 믿고 남편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부부가 서로 반목하니 이것이 가도家道가 무너지는 길이다.”
이후 1510년중종 5에도 성균관 생원 이경李敬 등이 조선의 결혼 풍속을 비판하면서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여자가 남자 집으로 가서 사는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인의 예도를 바로잡으소서. 우리나라의 제작과 문물은 중화中華를 모방했는데, 홀로 이 혼례만은 아직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니, 우리 세종장헌대왕世宗莊獻大王께서 인심의 민멸泯滅을 슬프게 여기시어, 친영親迎의 예를 제작하시고 왕궁에서부터 시행하셨으니, 대개 먼저 실행하시어 아랫사람들을 따르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부士夫의 집에서는 옛 습속에 젖어서 이것을 행하지 못하고, 세대를 지냄이 이미 오래되자 성자신손聖子神系이 다시는 조종의 뜻을 본받아 거듭 밝히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혼인하고 장가가는 집에서 바른 예법을 따르지 않고, 남자가 어두운 밤을 타서 여자의 집에 이르러 면목面目도 보기 전에 정의가 이미 친압視狎하게 되니, 예물을 갖고 서로 보는 예절이 어디에 있습니까. 초례醮禮를 마치면 남편은 아내의 집에 기우寄寫하여 마치 머슴이 부잣집에서 호구糊口하는 것 같으니, ‘너의 집으로 가라’고 한 경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까닭에 며느리가 시부모 섬기는 일을 알지 못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며, 남편이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여 부부의 도가 어그러지게 되고, 존비尊卑가 서로 업신여기며 음양이 서로 저항하여 하늘과 땅이 거의 위치를 바꾸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작은 사고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남자는 30세에 장가들고 여자는 20세에 시집갔는데, 지금 사람들은 나이가 열 살도 못 되어서 반드시 갓 쓰고 비녀 꽂아 아내를 맞고 남편에게 시집가곤 하여, 이미 가정의 책임이 있게 되니, 예절을 훼손하고 도리를 어그러뜨림이 또한 심합니다. 왕길王吉이 말하기를,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너무 이르면 부모 되는 도리를 알지 못한 채 자식이 있게 되니, 이 때문에 교화가 밝아지지 않고 사람들이 요사夭死하는 일이 많다”고 했으니, 지금 세상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또 혼인하는 집의 복식과 좋은 음식은 다투어 화려하고 사치하게 하여, 재물이 있는 자는 한 번에 거만巨萬의 돈을 소비하고, 가난한 자도 따라가기를 힘써서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면 아들은 장성하고 딸은 장년壯年이 되도록 때를 잃어 홀몸을 원망하는 자가 있기에 이르니, 화기를 손상하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친영의 예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신부를 맞이해 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혼례의식이다. 이경의 이 말을 동해 16세기 조선 중기까지도 장가와 처가살이의 풍속이 여전했음을 알 수 있다.
여자의 경제 주도권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 이후 여자에 대한 불평등과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임병양란과 성리학주자학의 정착은 다른 무엇보다 남녀의 공존의식을 파괴했는데, 특히 여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사회참여를 배제했다.
조선 후기엔 혼인 제도가 이전과는 달리 반친영半視迎으로 바뀌었고, 재산상속도 남녀균분에서 장자 중심으로 변했다. 반친영은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식을 올리되 3일 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는 따로 신부례 날을 정해 시댁으로 가서 시부모에게 폐백을 올린 후 시댁에 눌러앉아 살게 되는 혼인 제도이다. 즉 시집살이다. 또 남녀의 역할과 지위를 엄격히 구분하는 내외법內外法이 강화되어 여자의 사회참여를 철저히 금지했다. 이렇게 여자가 권리를 잃어 감에 따라 그 사회적 지위도 점점 하락되었는데, 그 결과 남자는 높고 귀하며 여자는 낮고 천하다는 남존여비 의식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컸다. 특히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에서 여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으로 당시 여자는 상하층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 길쌈베짜기을 했는데, 이는 농업과 함께 국가 경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간산업이었다. 여자는 길쌈을 동해 가족에게 필요한 옷을 짓거나 각종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완성된 베는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길쌈하는 부녀 한 명이 농부 세 명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었다. 길쌈을 통해 가계 운영에 기여함으로써 여자는 집안에서 남자가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엔 가문 중심의 문벌사회 강화로 양반 남자는 예절을 지키며 경제 활동을 비천한 행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자연히 그 공백을 여자가 채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여자는 길쌈이나 바느질, 양잠, 농업, 금융업, 부동산업, 상업, 절약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통해 가계를 운영하고 재산을 증식하는 한편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결국 조선 후기에도 여자는 내외법의 강화로 사회참여만 배제됐을 뿐, 집안에서의 지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평민층 여자는 내외법에도 적용받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국가적으론 가부장제 사회였지만, 집안 즉 가족 사회에서는 남녀의 지위가 동등했다.
조선 시대엔 집안의 규모가 매우 크고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집안 살림도 크게 안살림과 바깥살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음식과 의복 마련 등 안살림은 주로 여자가 담당하고, 농사를 지어 양식이나 반찬거리를 마련하고 그 밖의 재산 증식, 노비 관리, 자녀 교육, 가족 돌보기 등 바깥살림은 남자가 담당했다.
여자가 음식과 의복 마련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일들이 워낙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아니라 가족의 생존과 직결된 필수적인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는 목숨을 담보로 할 정도로 위험한 임신과 출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살림을 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녀 간 성별 역할이 엄격하게 나뉘거나 고정화되지는 않았고 상황에 따라 변통되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송덕봉宋德峰, 1521 ~1578은 남편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유배를 가거나 관직 생활 등을 이유로 자주 집을 비우자 혼자서 안팎의 살림을 모두 주관했으며, 18세기 연암燕嚴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자식 교육과 음식 수발, 가족 돌보기 등 아내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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