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4일 월요일
오후 4시 30분,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몰려든 승객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하교 행렬에서 뒤처지거나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버스 카드를 단말기에 찍으며 57번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퇴근하는 사람들, 쇼핑하러 나온 사람들, 심부름 가는 아이들이 오클랜드시 이곳저곳에서 올라탄 여러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버스 안은 소란스러웠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이쪽저쪽에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웃음을 터뜨렸고, 앞쪽 좌석에 앉은 노부인은 계속해서 운전사에게 말을 걸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부로 서머타임이 끝났으므로 한동안 오후였던 공간을 향해 저녁이 내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보다 더 어스름해지고, 한층 나른하며, 한 걸음씩 겨울을 향해 다가가던 즈음이었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이리저리 긁힌 자국에 거뭇거뭇한 검댕이 묻어 더러운 차창을 통해 흔들리는 거리의 불빛들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사샤는 버스 뒤편에 앉아 있었다. 한참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이 십대는 러시아 문학 수업을 준비하며 문고판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있었다. 이날도 여느 때와 같이 검정색 플리스 재킷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있었다. 회색 헌팅캡을 쓰고, 하르르한 흰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작은 사립 고등학교의 졸업반이었던 사샤는 자신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에이젠더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버스가 느릿느릿 속도를 줄이며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사샤는 읽던 책을 떨구며 설핏 잠이 들었다. 펼쳐진 치맛자락이 좌석 가장자리로 무심하게 늘어졌다.
십대 소년 셋이 사샤가 앉은 자리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키득거리며 장난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인 리처드는 검은색 후드 티 차림에 주황색 챙이 달린 뉴욕 닉스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오클랜드 고등학교 3학년생인 열여섯 살의 리처드는 개암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한 박자 느리게 슬며시 짓는 따뜻한 미소가 일품이었다. 리처드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둥을 잡은 채 사샤를 등지고 서 있었다.
리처드가 일행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거나 올근볼근 실랑이하는 동안에도 사샤는 풋잠에 빠져 있었다. 리처드의 사촌인 로이드가 버스 안을 왔다 갔다 겅중대며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의 관심을 사려고 애쓰는 사이에도 사샤는 잠들어 있었다. 리처드가 남몰래 라이터 불을 댕겨 하르르한 흰색 치마 밑단에 갖다 댔을 때에도 사샤는 깨지 않았다.
잠깐 멈춰 보라.
잠시 후, 사샤는 불덩어리에 휩싸인 채 잠에서 깨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잠시 후, 버스에 탄 모두가 우왕좌왕하기 시작할 것이다.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2도 내지 3도 화상을 입은 사샤가 앰뷸런스에 실려 샌프란시스코의 화상 병동으로 이송되고 앞으로 3주 반 동안 여러 차례 수술을 받게 될 것이다.
이튿날 학교에서 경찰에 체포된 리처드는 두 건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될 것이고, 그 각각에 혐오죄 조항이 추가된다면 형량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지방검찰청은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리처드를 성인으로 기소할 것이고, 그 결과 리처드는 보통의 소년범이 받을 수 있는 모든 보호 조치들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 주가 다 가기도 전에, 리처드는 종신형을 받을지도 모를 운명을 마주할 것이다.
아직은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두 십대 청소년이 함께 있을 뿐이다.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잠든 사샤를 깨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리처드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버스 운전수가 버스를 세우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오클랜드의
두 얼굴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는 인구 40만이 넘는 도시이지만 작은 마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지리적 면적이 작다는 의미는 아니다. 202제곱킬로미터에 걸친 도시는 염수가 얕게 흐르는 샌프란시스코만 가장자리의 하구에서 시작하여 보브캣과 코요테가 어슬렁거리는, 녹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높고 낮은 언덕으로 이어진다. 오클랜드가 소도시처럼 느껴지는 진짜 이유는 시민들 사이의 관계망,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는 방식 때문이다. 눈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이는 동안 우리가 남긴 발자국, 걸어온 자취도 그 위에 층층이 새겨진다. 오클랜드에서는 지인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들의 고모와 이모, 사촌들까지 모두 서로 알게 된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교회에서 예배를 보기 때문이다. 같은 팀에서 스포츠 활동을 하고, 같은 건물에서 일한다. 지나온 길들이 서로 스치며 만나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서로 얽힌다.
흔히 오클랜드를 미국에서 가장 다양성이 넘치는 도시 중 하나로 평가한다. 아시아계, 라틴계, 흑인, 백인, 아프리카계, 아랍계, 인도계, 이란계, 아메리카 원주민, 태평양 제도 출신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그중 어떤 한 집단도 다수가 아니다. 미국에서 인구수 대비 레즈비언 커플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이며, 세대주가 게이 또는 레즈비언인 가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다. 열린 마음, 가식이 없는 태도, 그리고 고유한 지역 은어오클랜드 사람들은 강조의 의미로 ‘베리’very, 대신에 ‘헬라’hella를 쓰고, 그보다 예의 바르게 말하고 싶을 때에는 ‘헤카’hecca를 쓴다.를 자랑스레 여기는 도시다.
이처럼 여유로운 포용성을 가진 반면에 오클랜드는 대비가 극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2013년, 사샤가 버스 안에서 화상을 입게 된 그해에 오클랜드는 미국에서 소득 격차가 가장 큰 도시 순위에서 뉴욕의 뒤를 이으며 7위를 기록했다. 인구 대비 강간이나 성폭력, 강도, 폭행,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의 비율을 볼 때 미국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도시이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집세가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중력이 아래에서 위로 작용한다. 돈이 언덕을 거슬러 위로 흐른다. 언덕빼기의 부촌에는 좋은 학교가 여럿 있다. 범죄율이 낮은 이 동네에서는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만의 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베이 지역에서 첨단산업 붐이 일어난 덕분에 오랜 시간 비어 있던 시내 곳곳의 유서 깊은 건물들은 신생 기업, 수제 청바지를 판매하는 고급 상점, 일곱 가지 재료를 섞은 칵테일이 나오는 나이트클럽 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풍요로움이 리처드가 살던 이스트오클랜드의 평지까지 흘러 내려오지는 않았다. 2013년 오클랜드 도시 전체에서 보고된 살인 사건의 대부분이, 보다 정확하게는 3분의 2가 이스트오클랜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스트오클랜드의 학교는 보다 허름하고, 학생들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거리에 쓰레기가 더 많았으며, 떠돌이 개도, 주류 판매점 수도 더 많았지만 식료품 가게는 더 적었다. 도로의 중앙분리대에는 마구잡이로 자란 잡초가 수북했다.
오클랜드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18킬로미터 거리를 운행하는 57번 버스는 이웃하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지역을 지나간다. 오클랜드 북서쪽 모퉁이에서 시작하여 대각선을 그리며 느릿느릿 도시를 가른다. 사샤의 집과 리처드의 학교가 있는 산기슭의 중산층 거주 지역을 통과한 버스는 맥아더대로를 따라 120개 블록을 달려 리처드의 집에서 가까운 오클랜드의 남동쪽 경계에서 그 여정을 마친다. 매일 오후, 두 십대 청소년의 동선은 단 8분 동안 겹쳤다. 57번 버스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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