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9

신경림 시집

저자소개

저자 · 신경림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다녔으며, 대학 재학 중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에 《농무(農舞)》,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낙타》 등이 있으며, 산문집에 《시인을 찾아서》, 《민요기행》 등이 있고, 어린이 책 《겨레의 큰사람 김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 그림책 《아기 다람쥐의 모험》 등이 있습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예술부문), 4·19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습니다. 접기

고추잠자리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해 질 녘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당신은 시간을 달리는 사람


복사꽃 살구꽃이 피어 흐드러지고 안개를 뚫고 햇살이 스민다. 나는 먼 나라, 더 먼 나라로 가는 꿈을 꾸면서. 당신과 함께 나의 스물에.


종일 나는 거리를 헤맨다. 문득 기차를 타고 가다가 산역에서 내리기도 하고. 모차르트를 듣고 트로츠키를 읽는다. 당신의 눈빛에서 꿈을 놓지 않으며. 당신은 나를 내 나이 서른으로 이끌고 가고.


세상은 어둡고 세찬 바람은 멎지 않는다. 나는 집도 없고 길도 없는 사람. 달도 별도 없는 긴 밤에, 빈주먹을 가만히 쥐어보면 문득 내 앞에 나타나는, 당신은 나의 마흔에서 온 사람.


조금은 서글퍼서 조금은 아쉬워서, 몇발짝 뒤처져 남을 따르면서,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다가. 마침내 체념하고 돌아설 때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은 나와 나이 쉰도 예순도 더불어 하면서.


이제 내 곁에 와 서 있다. 내가 지금껏 알지 못한 세상의 기쁨을 알게 하면서,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세상의 아픔을 보게 하면서. 내 빛과 그늘을 모두 꿰뚫고서, 당신은 시간을 달리는 사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