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페르세우스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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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Turkey가 튀르키예Türkiye로 바뀐 지 3년밖에 안 되어선지, ‘튀르키예’ 이야기를 할 때면 ‘터키’가 먼저 튀어나오곤 합니다. 튀르키예 학생에게 튀르키예인과 튀르키예어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도 바뀌었느냐고 물었더니 예전 그대로 ‘터키시Turkish’랍니다. ‘터키칠면조’만 아니면 괜찮다고 하더군요. 터키, 아니 튀르키예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길거리 상점에 진열해 놓은 파란색 눈들과 바실리카 저수조 속 메두사의 얼굴 조각들이었습니다.
| 상점에 진열된 나자르 본주, 이스탄불.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Blue_eyes.JPG#/media/File:Blue_eyes.JPG 제공. |
“악마의 눈”으로 불리는 이 파란색 눈은 나자르 본주Nazar Boncuğu로 악귀나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바탄 사라이Basilica Cistern라고 불리는 지하 저수조에 갔더니 고대 로마의 신전들에서 베어 왔다는 336개의 돌기둥 중에 메두사의 머리를 받침으로 세운 기둥이 두 개 있더군요. 메두사의 머리 조각은 원래는 주두柱頭, Capital였는데 이곳 수조에서는 거꾸로 돌려서 받침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메두사의 시선이 지닌 치명적인 힘을 누르려고 일부러 기둥 받침으로 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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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바탄 사라이에 있는 메두사 머리 조각, 532년. 이스탄불. |
첫 번째 메두사 사진에는 기둥 옆을 지나는 관광객이 찍혀서 메두사 머리가 조금 가려졌지만, 제가 찍은 이 엉성한 사진보다 더 나은 대안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어서 그대로 실었습니다. 나자르 본주와 메두사 조각을 한 도시에서 연달아 보다 보니 나자르 본주와 메두사의 시선 중 어느 쪽 힘이 더 셀지 궁금해지더군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메두사를 만나러 갈 때 이 나자르 본주를 들고 갔다면 메두사의 시선에도 돌로 변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혼자 실없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메두사를 그린 그림들은 뱀 머리카락이 너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꼼꼼하게 살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메두사 그림 중 그나마 제일 안 무서워 보이는 그림을 한 점 보여드리겠습니다.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는 마십시오. 보는 사람을 돌로 바꾸지는 못한다 해도 몸을 굳게 만드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아래 그림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그린 『메두사이탈리아어: Testa di Medusa』1597입니다. 그런데 메두사의 얼굴이 남자처럼 보이죠? 그것은 카라바조가 메두사 얼굴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카라바조에게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David and Goliath』에서도 목 잘린 골리앗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거든요. 아래 그림에서 캔버스가 둥근 톤도tondo 형태인 것은 아테나 여신의 방패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벤 후 아테나 여신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선물하자, 여신이 방패에 메두사의 얼굴을 박아서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 카라바조, 『메두사』, 1597년. 나무에 붙인 캔버스에 유화, 60 × 55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조각 작품은 관람하기가 훨씬 낫습니다. 일단 흰색으로 통일된 데다 그림만큼 뱀 이미지가 세세하게 묘사되지 않아서 살짝 귀엽기까지 합니다. 쾰른의 로마-게르만 박물관독일어: Römisch-Germanisches Museum에서 만난 고대 로마 시대의 메두사 조각도, 로마의 카피톨리노 박물관이탈리아어: Musei Capitolini에서 본 메두사 조각도 카라바조의 그림에 비해 훨씬 덜 무서워 보입니다.
| 메두사의 얼굴 조각, 기원전 2세기경. 대리석. 로마-게르만 박물관, 쾰른. |
| 잔 로렌초 베르니니, 『메두사』, 1638~1648년. 대리석. 카피톨리노 박물관, 로마. |
그런데 메두사는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외모를 갖게 됐을까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메두사는 한때 매우 아름다웠으며,
많은 구혼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모든 특징 중에서 머리카락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바다를 다스리는 포세이돈이
아테나 여신의 사원에서 그녀를 욕보였다.
그러자 제우스의 딸은 고개를 돌리고
방패로 정숙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런 행동이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지 않도록
고르곤의 머리카락을 더러운 뱀들로 바꿔버렸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아테나 여신의 입장으로는 분노할 만하죠? 여신을, 그것도 처녀 신을 모독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신에 대한 불경죄에 대해 아테나 여신은 메두사만 처벌합니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다른 신을 처벌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우스가 다른 여성을 유혹했을 때 헤라 여신이 제우스는 제쳐두고 상대 여성에게만 보복을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우스에게 유혹당한 여성 중 상당수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메두사 역시 피해자였지만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신을 모독한 인간은 피해자건 아니건 가차 없이 처벌하는 것이 그리스 신화 체계의 불문율이었으니까요. 메두사는 신에게도 징계 대상이지만 인간에게도 제거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처벌받는 처지가 됩니다. 몸은 사람인데 머리카락은 뱀인 메두사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괴물이기 때문이죠. 질서 체계를 유지하려면 이 괴물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고,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페르세우스입니다.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의 공주 다나에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외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델포이의 신탁에 겁이 나서 다나에가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청동 탑에 감금했답니다. 남자를 못 만나게 원천 봉쇄를 시도한 거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죽이려 한 것보다 더 심하죠? 신이 정한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면 미리 자기 운명을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불길한 예언 때문에 이후의 삶이 더 불행해지지 않을까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죠. 어쨌든, 아크리시오스는 딸을 탑에 가둬두고 안심했겠지만, 뛰는 자 위에는 항상 나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우스는 황금 구름으로 변신해서 청동 탑으로 들어가 황금 비를 뿌렸고, 이 비를 맞은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 다나에에게 황금비를 내리는 에로스, 고대 로마 시대의 폼페이 프레스코. 국립 고고학 박물관, 나폴리. 위키미디어 제공. |
| 피아노에 그려진 수태고지, 1858년.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
두 그림이 비슷하죠? 다나에가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와 결합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볼 때면, 저는 개인적으로 수태고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란 기독교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수태될 것이라는 소식을 알리는고지 것을 의미합니다. 거의 모든 수태고지 그림에서 성령은 황금 빛줄기로 그려집니다. 제우스의 황금비는 황금 동전 모양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4화 「세멜레」 편에 실린 티치아노 베첼리의 『다나에』 그림에서 동전 모양의 황금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위의 폼페이 프레스코에서처럼 황금 빛줄기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수태고지가 수록된 「누가복음」80~90년보다 『변신 이야기』8년가 먼저 쓰인 것을 감안한다면, 다나에 신화가 마리아의 예수 수태 이야기의 전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이미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했더군요.
다나에가 페르세우스를 낳자 아크리시오스는 두 사람을 큰 궤짝에 넣어 바다에 던졌고, 페르세우는 세리포스 섬에서 자랍니다. 다나에를 아내로 맞고 싶어 하던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는 흉계를 꾸며 페르세우스에게 고르곤 자매 중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러자 여러 신이 나서서 페르세우스를 돕죠. 아테나는 청동 방패를, 헤르메스는 금빛 날개가 달린 샌들을, 헤파이스토스는 검을, 하데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구를 페르세우스에게 줬습니다. 메두사는 세 명의 고르곤 중 유일하게 불멸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페르세우스는 아테나로부터 받은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페르세우스가 어떻게 메두사를 처치했는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죠.
아틀라스의 얼음처럼 차가운 비탈 밑,
단단한 암벽 속에 안전하게 자리 잡은
동굴이 있었다. 입구에는
두 자매인 포키스의 딸들이 살고 있었는데,
눈이 하나뿐이라 서로 나눠 썼다.
그는 자매들이 눈을 주고받을 때
자기 손을 내미는
교묘한 수법으로 그 눈을 훔쳤다.
그는 다가가기 힘든 오지들과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바위를 지나
고르곤들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들판과 길
여기저기에 메두사를 본 후
돌로 변해 버린
들짐승들과 사람들의 형상이 보였다...
그는 왼쪽 팔에 들고 있던 빛나는 방패에
반사된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메두사와 뱀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그녀의 목을 벤 다음 머리를 움켜쥐었다...
메두사의 피에서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형제도 태어났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페가수스는 울부짖으며 메두사의 죽음을 알렸고, 그 소리에 깬 두 언니는 메두사가 살해당한 것을 깨닫고 격분했습니다. 그녀들은 메두사를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구를 쓴 페르세우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죠. 페르세우스는 두 언니가 불사의 존재라는 사실을 아테나 여신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메두사의 머리를 마법 주머니에 넣고 유유히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메두사의 머리는 잘린 후에도 사람을 돌로 만드는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세우스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폴리덱테스를 돌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후 그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 여신에게 바쳤고, 여신은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자신의 방패인 아이기스에 박아놓았죠.
| 벤베누토 첼리니,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1554년. 브론즈. 시뇨리아 광장, 피렌체.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Firenze.Loggia.Perseus02.JPG#/media/File:Firenze.Loggia.Perseus02.JPG 제공. |
| 메두사의 얼굴이 박힌 방패를 들고 있는 아테나 여신.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바티칸. |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조각상에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지 않도록 눈을 내리뜨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두사의 힘이 이제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을 방문했을 때,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는 메두사 머리 위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서 겁도 없이 똥을 싸고 있더군요. 아테나 여신의 방패 속 메두사도 그렇게 무서워 보이지는 않고요. 에밀리 어윈 컬페퍼Emily Erwin Culpepper는 「고대의 고르곤 자매들: 현대 여성들의 분노를 나타내는 얼굴Ancient Gorgons: A Face for Contemporary Women's Rage」에서 메두사의 끔찍한 외모가 여성이 느끼는 분노를 상징한다고 지적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메두사는 성폭력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 여신에게 혼자만 처벌을 받았습니다. 신이건 인간이건 남성은 면책특권을 누렸던 반면, 여성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됐죠. 그러니 분노에 가득 찬 메두사의 얼굴은 역사적으로 억압 받아 온 여성의 분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존스턴Elizabeth Johnston은 「최초의 끔찍한 여성The Original Nasty Woman」2016에서 메두사를 정복하고 제거해야 할 위협적인 존재로 악마화하는 것이 여성의 힘과 권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메두사 신화와 메두사 이미지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권력에 대한 여성 혐오적 편견을 보여준다는 거죠. 강력한 여성 정치인들을 메두사 이미지로 변환해서 공격하는 정치 현실이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여성 혐오와 연관된 해석을 하나만 더 살펴볼까요? 뱀은 허물을 벗은 다음 다시 태어나고, 꼬리를 물면 원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재생과 변신, 불멸, 무한함에 대한 은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반면에, 사악함이나 속임수, 유혹, 교활함을 나타내는 은유이기도 하죠. 진짜 의도를 숨기고 상대를 속이는 사람들이 풀 속에 숨어 있는 뱀과 비슷하니까요. 특히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동산에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이브를 유혹하기 때문에, 뱀은 곧 사탄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뱀 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는 뱀 같은 혀를 놀려 남성을 유혹해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성의 설득력에 대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메두사의 신화는 여성의 설득력을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메두사의 신화를 여성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컬페퍼와 존스턴과 달리, 프로이트는 「메두사의 머리Medusa’s Head」1922에서 메두사의 얼굴을 거세에 대한 공포와 연관 짓습니다. 메두사의 얼굴이 무서운 이유는 메두사의 머리가 거세된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위에 언급된 해석을 포함해서 메두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여러 시도 덕에 요즘에는 메두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불식된 것 같습니다. 메두사의 얼굴을 브랜드 로고로 삼은 명품 브랜드 베르사체Versace까지 등장했으니까요. ‘베르사체의 작품을 한번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함으로 사람들을 돌처럼 만들겠다’가 이 회사의 모토랍니다. 뱀 머리카락이 위에 보여드린 조각 작품 수준으로 단순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메두사의 얼굴이 그려진 베르사체 식기를 사용할 엄두는 안 나더군요.
이제는 페르세우스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신화를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페르세우스의 선택이 일어난 순간은 언제일까요? 폴리덱테스로부터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페르세우스는 여러 신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는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청동 방패를, 헤르메스로부터 금빛 날개가 달린 샌들을, 헤파이스토스로부터는 검을, 하데스로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구를 받죠. 그러나 이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메두사를 어떻게 처치할지는 전적으로 페르세우스가 결정할 문제였습니다.
그는 왼쪽 팔에 들고 있던 빛나는 방패에
반사된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메두사와 뱀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그녀의 목을 벤 다음 머리를 움켜쥐었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신화 속 결정적인 선택은 바로 이때 이루어집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바라보며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메두사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공격할 것인가?’ 고민했을 겁니다. 공격하려면 메두사를 바라봐야 하는데 바라보면 돌이 될 것이고, 메두사를 바라보지 않으면 정확하게 공격할 수가 없겠죠. 이것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메두사를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직시할 것인가?’라는 페르세우스의 딜레마는 먼저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도전의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프시케의 신화와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는 ‘보지 말라’는 금기가 신이 내린 명령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얼굴을 불빛에 비춰 ‘보지 말라’고 명령했고,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서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명령했죠. 메두사의 경우에는, 신이라는 권위적인 존재를 통하지 않더라도 얼굴 그 자체가 ‘보지 말라’는 금기로 작용합니다. 메두사의 얼굴을 쳐다보면 돌이 된다는 사실은 그녀의 얼굴이 보아서는 안 될 것 그 자체라는 의미죠. 메두사를 외면하는 것은 금기를 따르는 것이고, 메두사를 직시하는 것은 금기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기를 충실히 지키는 것은 체제에 대한 순응으로, 금기를 어기는 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집니다. ‘메두사의 얼굴을 직시할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의 대립 구도는 다시 자유로운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귀결됩니다. ‘보는 것’은 다시 ‘아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메두사의 얼굴을 직시하고 싶은 욕구’는 ‘자유롭게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하죠. 반대로, 메두사의 얼굴을 직시할 경우 벌어질 끔찍한 결과를 우려해서 내려진 ‘메두사의 얼굴을 보지 말라’는 금기는 지적 호기심에 대한 통제로 작용하고요.
그런데 페르세우스는 이 두 대립 구도를 무너뜨리는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딜레마를 벗어납니다. 앞에서 다룬 신화의 주인공들은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딜레마와 자유로운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딜레마에서 체제에 대한 도전/자유로운 지식 추구라는 선택지를 택함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반면에 페르세우스는 이 대립 구도에서 양자택일 대신 양자를 모두 선택합니다. 아니, 양자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외면하면서 직시했고, 외면하지 않으면서 직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금기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금기를 위반했죠.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냐고요? 반짝이는 청동 방패를 거울삼아서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페르세우스는 이 선택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면서 도전했고, 지적 호기심을 적당히 억누르면서 충족했습니다. 비극적인 결과라는 부작용 없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한 겁니다.
아테나 여신의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를 바라보는 페르세우스의 해결 방법을 통해 지식의 두 가지 특성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지식 대상이 간접적으로만 인식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 말은 지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메두사를 직접적으로 바라본 사람이 모두 돌이 된다는 것은 지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메두사라는 대상을 인식할 때 거울 역할을 하는 청동 방패가 필요한 것처럼, 대상을 인식하는 데는 반드시 언어라는 매개가 필요합니다. 언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은 채 지식이나 진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어가 대상을 인식하고 재현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거죠.
지식 혹은 진리가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첫 번째 특성은 인간은 불완전한 지식, 즉 부분적인 지식만 인식할 수 있다는 두 번째 특성으로 이어집니다. 즉, 완전한 지식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사실,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은 실제 메두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거울 속 메두사의 이미지는 실제 메두사보다 더 작고, 왼쪽과 오른쪽이 전도되어뒤집혀 있습니다.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식된 대상이 실제 대상의 부분적인 재현인 것처럼,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재현된 지식/진실 역시 부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영역, 상징화를 벗어난 영역이 항상 존재하니까요. 페르세우스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면서도 오이디푸스처럼 비극적 종말에 이르지 않은 것은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식의 일부만 인식하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피터 브룩스Peter Brooks, 1938~ 의 말을 떠올려볼까요? “우리는 결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가 아닌 부분만으로, 또한 몇몇 계시적 순간들과 옷을 벗는 순간들, 그리고 베일 사이로 보이는 틈새만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바라보기로 한 페르세우스의 선택은 인간의 지적 탐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페르세우스 신화는 ‘지식의 일부만 인식하는 것에 만족하라’는 브룩스의 조언과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라고 한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st Peter Fischer, 1947~ 의 조언을 보여주는 선구적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적 탐구를 완전하게 허용해야 할까? 아니면 규제해야 할까?’라는 딜레마가 이 두 조언으로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적 탐구를 100% 통제하는 것은 곧 지적 탐구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지적 탐구를 금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이것을 어느 정도 통제해야 적절한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격하게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AI의 대부로 불리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제프리 힌턴Geoffrey Everest Hinton, 1947~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AI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주 하원 예산위원회가 거대 AI 모델이 악용돼 인류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2024년에 「첨단 AI 시스템을 위한 안전과 보안 혁신법안」에 대한 수정안을 통과시키자 AI 기업들과 여러 학자가 이런 규제가 “혁신을 억제할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AI 분야에서만 이런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첨단 과학, 기술 분야에서 ‘자유로운 지적 탐구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규제할 것인가?’라는 논쟁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죠. 인류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 딜레마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페르세우스처럼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보시겠어요?
여러분이 페르세우스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설사 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메두사의 얼굴을 직시하시겠어요? 아니면 외면하시겠어요? 아니면 메두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