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2

전국 필사 친구들의 연말 책파티

저자소개

최혜련
독서동아리 ‘첫문단클럽’ 회원


최혜련

소속 동아리 첫문단클럽

여행 지역 세종시 세종지혜의숲

여행지 한 줄 추천 책의 소중함을 나눈 사람들과 추억을 만드는 기쁨


‘첫문단클럽’. 소설의 첫 문단을 필사하는 독서동아리의 이름이다. 소설의 첫 문단은 작가들이 가장 공들이는 문단이라고 한다. 소설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알아볼 수 있고, 사건의 기미들을 파악할 수 있으니 눈여겨보게 된다. 또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독자와 처음 마주하는 문단이기에 더욱 여러 번 눈으로 밑줄 긋게 된다. 나는 소설의 첫 문단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었다. 소설가 친구들이 있어서 첫 문단을 얼마나 고심하며 쓰는지 알기 때문에 쉽게 읽고 넘겨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필사 모임을 생각했다. 소설의 첫 문단을 필사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로 인증해서 공유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씩 맡아 각자 자신이 담당하는 요일에 소설과 소설의 첫문단을 소개하는 방식이면 어떨까 싶었다.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렸고 특별히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 ‘첫문단클럽’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큰 반응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과 달리 지원한 사람이 많아 3개의 방을 운영하게 되었다. 운영자인 나보다 더 열심히 고심하여 소설을 고르고 정성 들여 문장을 필사했다. 전에는 내가 소설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새로운 소설을, 혹은 읽었지만 가물가물한 소설을 다시 만나는 행복을 아침마다 누렸다. 방마다 분위기가 달랐는데 그중 한 곳은 그야말로 소설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였었다. 그때는 열성적인 분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함께 만나 책여행을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첫문단클럽’은 여섯 명이 모여서 요일에 따라 문단을 필사하고 인증한다. 아침마다 단정한 글씨로 필사한 귀한 문장들을 만나니 일상의 시작이 달라졌다. 내가 기대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일 년 동안 서로 문단을 나눈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소설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월요일이면 한국의 단편 소설을, 화요일이면 영미문학의 고전 소설을, 수요일이면 여성 작가의 장편 소설을, 목요일이면 난생 처음 듣는 낯선 작가의 소설을, 금요일이면 이름만 들어본 대하소설을, 토요일이면 내가 책장을 더듬어 한 권의 소설을 필사해서 공유했다.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우리의 일주일은 각자의 소설 큐레이션에 익숙해졌다.


처음 보는 감각적인 소설을 소개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오래전에 읽은 감동적인 소설을 다시 만나며 여운에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소설의 첫 문단만 나눌 뿐인데도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또 제각각인 글씨체를 보면 편지를 받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글씨체도 각자 개성이 있어서 매일매일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각자가 선호하는 펜이나 필기구도 떠오를 만큼 인증을 보는 반가움이 있었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며 내적 친밀감이 가득 쌓이자 누군가 먼저 말했다. 


“우리 만날까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각자 사는 곳이 전국 방방곡곡이라 어려울 듯했다. 서울, 경기, 인천, 대구, 세종, 포항 등 서로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매일 소설의 문단을 나누고 편안하게 책 수다를 나눠 온 우리가 마음으로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간 거리에서 만날까요?” 


전국 지도를 펼쳐 가장 먼 지점을 긋고 그 중간을 찾아보기도 했고, KTX 시간을 비례로 후보지를 물색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마음을 모은 곳은 세종, 지혜의숲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책이 많은 곳에서 만나자는 생각이었고 모두가 동의했다. 어렵사리 날짜를 잡으며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몇 학년인지, 결혼을 했는지, 나이가 몇 살인지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SNS의 별명을 불러왔기에 본명도 회비 송금이나 기차표를 예약하며 알게 되었다. 낯설지만 예쁜 이름들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지역도 몰랐다니... 일 년 동안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각자의 일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것이다.


세종지혜의숲. 엄청나게 큰 서재가 떠올랐다. 4층과 5층을 하나로 아주 높고 넓은 서재를 사진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너무 멀었고 세종시가 관광지가 발달한 곳은 아니기에 따로 갈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필사 모임 사람들을 지혜의숲에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뿐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추진력이 우리를 그곳으로 모이게 했다.


각자 사는 곳에서 오송역을 향해 모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인데도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서로의 팔을 끼고 걷게 했다. “안녕하세요~”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면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눠주기 위해 바리바리 싸 온 책들을 양손 가득 담아온 서로를 보고 웃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각자의 취향과 글씨체가 닮아 신기하고 반가웠다. 고딕체처럼 반듯한 글씨, 어린이처럼 정감 있는 글씨, 어른스러운 명조체 글씨, 휘날려 쓴 멋스러운 글씨 등등. 글씨로, 소설 취향으로 서로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놀랍고도 신기했다. 그런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만나자마자 좀 전에 카카오톡으로 나누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느 소설가의 신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는 우리는 가져온 소설책을 이야기하며 장소를 옮겼다. 세종에 사는 회원이 특별히 준비를 많이 했다. 전국에서 세종으로 몰려와 책을 주제로 연말 파티를 한다는 것이 놀라워서 책임감을 갖고 진심을 다해 준비한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파티룸을 빌려 환영 파티를 했다. 연말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크리스마스 콘셉트로 꾸며진 파티룸이었다. 대구에서 온 회원은 각자 쓸 수 있는 티아라를 챙겨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티아라를 쓰고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하며 어색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책을 들고 포즈를 잡으며 신나서 수차례 사진을 찍었다.


일 년의 시간, 아침마다 소설의 한 페이지를 나눴을 뿐인데 우리는 서로 닮아있었다. 어쩌면 닮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의 설렘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1년간 빼먹지 않고 자신이 맡은 요일에 또박또박 손글씨로 소설의 첫 페이지를 옮겨쓰는 것은 즐거움을 모르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년이 52주니까 대부분 50번 이상은 같은 마음으로 필사를 한 셈이다.


우리는 가져온 책을 쌓아두고 세종에 사는 회원이 직접 만든 김밥, 샌드위치, 샐러드를 먹었다. 각자 가져온 간식도 나눠 먹었다. 정말 예쁘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했기에 책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세종시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부터 고민과 부담이 컸을 텐데... 찾아와 주는 반가움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즐겁게 머물다 가야 한다는 생각에 때때로 마 음이 무겁진 않았을까. 돌아오는 길에 사진첩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본격적으로 책 선물을 나누고 책 수다를 떨었다. 간간이 사진도 찍으며 세종지혜의숲으로 갔다. 지혜의숲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정말 지금까지 가본 도서관 중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싶을 만큼 크고 멋진 곳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우리는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익숙하고 반가운 책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낯선 공간에서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세종지혜의숲 구경을 마치고 북카페에서 독서토론을 했다. 독서토론은 흥미진진했고 메시지에 말투가 생생히 재현되었다. 우리는 이 독서토론을 온라인에서 이어가자고 계획했다. 당일치기 여행이었기에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는 길에, 그리고 돌아와서 서로에게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진정한 친구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 만난 우정이었다.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독서동아리를 담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