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우리는 시적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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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에서 올랜도는 4세기에 걸쳐 젠더 이주 여행을 한다. 16세기에 그는 영국의 소년 귀족이었다. 러시아 소녀 사샤와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을 당한다.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난 뒤 영국 대사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된다. 그곳에서 민중혁명 시위대가 왕궁을 습격하는 동안 올랜도는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잠에서 깬 영국 대사는 집시 여인이 되어 유랑한다. 19세기 빅토리아조 영국으로 되돌아온 올랜도는 크레놀린을 입은 귀족 여인으로 변신한다. 20세기 초 올랜도는 신여성으로 살아간다. 만약 이 소설이 21세기까지 계속된다면 어땠을까? 울프의 SF적인 상상력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젠더 이주민 폴 프레시아도가 21세기의 올랜도가 되지는 않았을까?
프레시아도의 『천왕성에 집 한 채』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연재한 칼럼들의 모음집이다. 말하자면 프레시아도가 천왕성에다 종이로 지은 집이다.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전작들에 비하면, 이 책은 문학 텍스트로 읽어도 될 만큼 반짝이는 비유로 책 읽는 재미가 상당하다. 아미타브 고시는 우리 시대의 대혼란은 무엇보다 상상력의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프레시아도의 책을 읽으면, 우리 시대의 젠더 대혼란에 신선한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항성 선언Countersexual Manifesto』을 거쳐 이 책에 이르면, 프레시아도의 급진적 상상력은 우주적인 비유로까지 확장된다. 프레시아도에게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 규범은 중세적 우주관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비견된다면, 성별 경계를 ‘무단’ 횡단하는 트랜스 젠더 퀴어들은 양자물리학 시대에 ‘코페르니쿠스적’ 젠더-전회에 비견될 수 있다. 천동설이 우주의 질서이고 이성애가 자연의 섭리라는 신화가 진리였던 시대, 당대의 믿음에 저항하는 지동설 주창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지동설을 주장하다 화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지배적인 이성애 문법에 대항하는 프레시아도 또한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한때 프레시아도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지적 동지인 비르지니 데팡트가 이 책의 서문에서 토로하다시피, 프레시아도의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성별 이분법이라는 낡은 중력의 법칙은 추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중력에 매달려 사는 다수들은 탈젠더의 무중력 상태를 견딜 수 없어서 젠더 횡단자들을 혐오하는지도 모른다.
폴 프레시아도는 1970년 에스파냐의 부르고스에서 지정 성별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딸에게 베아트리스 프레시아도라는 이름을 물려준 그녀의 부모님은 이성애 규범에 엄격한 우파 가톨릭 신자였다. 「퀴어 아이는 누가 지키는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녀의 아버지는 “만약 자기 아이가 동성애자라면” 그런 아이는 차라리 죽여버리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런 아이”가 프레시아도였다. 그/녀는 일곱 살 때 미래의 결혼을 상상해보라는 수녀님의 말에 여자친구 마르타와 함께 고양이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아이를 정신과에 데려가 보라고 부모에게 조언했다. 당신이 이성애자가 아니라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정신병원이거나 죽음이다. 2005년 에스파냐 사회주의 정부가 동성결혼법을 제안했을 때, 그토록 강고했던 그/녀의 부모님은 이 법안을 지지하는 시위에 나섰다. 그들은 단지 자기 아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몸이든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의 부모가 될 권리를 위해 시위에 나섰다.
프레시아도에게 이성애 식민 자본주의는 시신 정치에 뿌리내리고 있다. 시신 정치는 이성애 재생산 규범에서 일탈하는 존재는 동성애자, 장애인, 노예, 선주민, 식민지,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소멸시키고 배제시킨다. 이성애 재생산만이 가능하도록 강제하는 생명 정치가 이성애 이외의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신 정치라는 점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고 변희수 하사를 애도하는 정보라 작가의 「그녀를 만나다」가 떠올랐다. 변 하사는 성별 정체성을 떠나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여군으로 복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럼에도 2020년 1월, 육군 전역심사위원회는 변희수 하사의 신체 변화성기 상실를 이유로 ‘심신장애 3급’으로 분류하여 강제 전역 처분을 내렸다. 성기의 유무가 나라를 지키는 업무수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그녀는 정신병자로 판정받고 강제 전역을 당했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지속적인 혐오에 시달렸다. 프레시아도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시신 정치에 의해 그녀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지금 그녀는 천왕성에서 집 한 채 마련했을 것이다.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행성이 천왕성Uranus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우라노스 Uranus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짝짓기 없이 태어난 아들이자 남편이다. 딱히 이성애자로 말하기 힘든 우라노스는 시쳇말로 ‘핀란드의 톰’과 같은 근육질 동성애자처럼 보인다. 그는 가정적인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권력과 쾌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가이아의 배속에 생매장했다. 하지만 티탄 중 한 명이자 막내 아들인 크로노스에 의해 아버지 우라노스는 거세된다. 우라노스처럼 이성애 재생산 임신형태와 사랑형태에서 벗어난 제3의 성들을 19세기 독일 법률가 하인리히 울리히스는 ‘우라니스트’라고 명명했다. 울리히스는 ‘천왕성에 집을 한 채 갖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유럽 시민이었다.’(31쪽)
프레시아도는 후기포디즘 시대를 시신 자본주의에 더하여 ‘약물포르노pharmacoporno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제약 산업을 통한 다종다양한 약물경구 피임약,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비아그라, 리탈린, 항우울제 등은 생화학적인 분자 수준에서 성, 젠더, 성별 정체성, 쾌락, 욕망, 정동, 중독, 죽음까지 생산, 조작, 배치한다. 남성, 여성이라는 ‘우리’의 시각적 인식 자체가 에스트로겐, 혹은 테스토스테론의 활성화에 따른 생화학적 반응일 수 있다. 약물에 덧붙여 ‘포르노그래피적’ 통치는 레거시 미디어, 소셜 미디어, 광고 이미지 등의 기호-기술-재현의 그물망을 통해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의 이미지를 포르노그래피적으로 이상화하고 확산한다. 환상적인 성별, 성적 주체 생산을 위한 특정 유형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품 소비를 부추기며,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자본의 이윤 창출로 수렴시키는 것이 약물포르노 자본주의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 성별 정체성은 자연의 질서이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약물포르노 복합체에 의해 신체 내부의 분자적 수준까지 관리되는 테크노 산물이자 생체 정치적 프로젝트와 다르지 않다.
약물포르노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전유하는 구체적인 사례가 프레시아도 본인이기도 하다. 프레시아도는 테스토스테론을 매개로 자신의 신체 변화를 실험하고 기록한다. 그/녀는 테스토스테론의 투여를 단지 트랜스남성이 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그것을 통해 남성화되는 신체실험 과정을 관찰하고자 했다. 하지만 젠더 전환을 위해 남성 호르몬을 처방받으려면 트랜스 남성을 욕망하는 것 자체가 정신병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을 투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프레시아도는 자신을 약물중독자, ‘테스토 정키’임을 인정한다. 요즘 테토녀, 에겐남이라는 말을 공중파에서도 심심찮게 듣는다. 여성이지만 테스토스테론이 과다분비되어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테토녀, 혹은 에스트로겐의 과다분비로 여성적인 남성을 에겐남이라고들 한다. 테토녀, 에겐남 같은 젠더 표현이 대중화된 것에는 우리가 다종의 호르몬 치료법에 익숙해진 약물포르노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르몬 하나가 우리의 성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시대에, 인공보철 딜도가 페니스를 선행하는 시대에, 생식기 중심의 이성애 재생산만을 규범으로 삼아서 그 이외의 성들을 억압하는 체제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하지만 익숙한 성별 이분법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천왕성으로 향하는 낯선 우주선에 탑승하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프레시아도가 성별, 성적 정체성을 교란하면서 넘나든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테스토스테론을 매개로 트랜스남성을 지향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트랜스남성도, 트랜스여성도 아니라는 선언만으로는 그가 왜 부치에서 탈주하여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트랜스남성에 더 근접하고 싶은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만인의 평등을 주장한 좌파들마저 트랜스 혐오 동성애 혐오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프레시아도가 ‘나의 어머니’로 지칭하는 칠레의 선주민 공산주의자 트랜스-젠더 시인, 소설가, 활동가가 페드로 레메벨1952-2015이다. 레메벨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독재1973-1990 정권의 폭압뿐만 아니라, 당시 민주화 운동 좌파진영 내부에 팽배했던 남성 우월주의와 동성애 혐오 또한 신랄하게 비판했다. 1986년 레메벨이 하이힐을 신고 공산당의 상징인 낫과 망치를 얼굴에 그린 채 선언문을 낭독했던 그 순간은 칠레의 현대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지금은 천왕성에 거주하고 있을 페드로 레메벨의 「나는 나의 차이로부터 말한다」1986 선언문의 몇 구절을 마무리로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시인으로 위장한 마리까호모를 비하하는 욕설가 아니다.
변장 따위는 필요 없다.
여기 내 얼굴이 있다.
나는 나의 차이로부터 말한다.
……
나는 나를 수없이 거부한 마르크시즘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변할 필요가 없다.
나는 당신보다 더 전복적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다.
나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미 늙었다.
그리고 당신의 유토피아는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다.
부러진 작은 날개를 가지고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날기를 원한다, 동지여.
당신의 혁명이 그들에게 날아오를 수 있는
붉은 하늘 한 조각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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