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9

파국의 시대와 공모하는 불길한 사랑들

저자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엘리자베스 보웬의 『한낮의 열기』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오래전 한 친구가 멀리서 보웬의 소설을 보내주었지만 읽는 데 실패했다. 단지 어렵고 지루해서 포기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난해함이 문제라면 그녀와 동시대의 모더니즘 작가들이었던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느린 호흡의 독특하고 모호한 문체 때문에? 절박한 시절에 한갓진 사람들의 한갓진 놀음이 아니꼬워서? 이해하기 힘든 모순적 감정의 억지스러운 융합 때문에? 그 당시 무슨 연유에서든 읽기에 실패했다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요즘 어처구니없는 탄핵정국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나마 콧구멍이 두 개여서 숨 쉬고 살고 있지만, 책 한 줄 읽기 힘들다. 탄핵 정국 탓을 하면서 분노와 불면으로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탄핵 과몰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집중할 다른 이야기가 절실했다. 때마침 보웬의 소설이 번역되었고, 과거 읽기에 실패했으니, 초집중하여 다시 읽고 싶은 오기가 발동했다. 작가가 진공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닌 것처럼, 독자 또한 진공 상태에서 읽는 것은 아니다. 읽고 싶다는 마음도 진공 상태에서 생기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한낮의 열기』 속에서 절박한 전시 상황을 살아가는 인물들은 세계의 파국과 미묘하게 공모하는 섬세한 감정을 드러낸다. 바깥에서는 대공습이 진행되고 있고, 내면에서는 “뚜껑 덮어두었던” 감정들이 들썩거린다. 두렵고 불안한 전시 상황에서 사랑과 배신, 충성과 반역, 신념과 진실이 혼란스럽게 뒤엉킨다. 산 자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망자들과 겹쳐 보인다. 불면의 밤을 보낸 후 절망의 정점에 달하는 정오의 열기 속에서 살아 있음의 기쁨을 확인하기 위한 소통의 욕망조차 공허하고 종잡을 수가 없다. 끝없는 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죽은 화폐’여서 통화로 통용되지 못한다. 전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 욕망과 허무가 예전과 달리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그런 절실함은 불한당들의 후안무치한 언어들이 활개 치는 심란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상황과 시국이 책읽기에 스며든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불확실한 봄날들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엘리자베스 보웬1899~1973은 그다지 익숙한 작가는 아닐 것이다.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심장의 죽음』 『파리의 집』 『한낮의 열기』 이외에도 다수의 장편, 단편 소설들, 상당량의 에세이들이 있다. 그녀는 동시대의 문학적 모더니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물들 내면의 자동기술적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또한 어느새 길잃은 영혼이 되어버린다. 유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무시로 출몰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내면의 혼란스러운 감정적 풍경과는 달리 바깥 세계를 묘사할 때는 치밀하고 섬세해서 심리적 사실주의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허한 사람들의 정처 없는 마음의 풍경에 대한 모호한 묘사와 대비되는 사물 세계에 대한 명료한 묘사는 그녀가 다층위적인 글쓰기에 탁월한 작가임을 보여준다.    


『한낮의 열기』는 2차 대전의 한중간이었던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발표 당시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전의 반열에 오른 다른 모더니즘 작품들과는 달리 그녀의 작품은 아카데미에서는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 그런 배경에는 그녀가 영국계-아일랜드인이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영국 본토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해 온 식민주의자들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지배계급으로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특권을 누렸지만, 19세기 말경에 이르면 영국계-아일랜드인 사이의 하이픈이 보여주다시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사이’의 존재들로서 몰락이 예견되었다.  


그녀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보웬은 바로 그런 영국계-아일랜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신경증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그녀가 열세 살 때 암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친척 집을 전전했다. 그때의 억눌린 감정들은 작중 인물들에게서 “뚜껑 덮인 삶”이라는 감정적 단절로 묘사되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처럼 그녀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 느끼는 비/장소성, 비/정체성으로 인한 분열적인 감정에 시달렸다. 그녀는 시혜적 영국 문학사에서도, 민족주의적 아일랜드 문학사에서도 주변적인 소수자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경계넘기, 혼종성, 교차성을 재가치화하는 시대에 이르러 그녀의 작품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행운은 아닐 것이다.  

 

『한낮의 열기』에서 긴 호흡으로 느릿느릿 전개되는 서사의 뼈만 발골한다면, 스릴러 멜로드라마 첩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런던은 독일군의 대공습을 받고, 배급제와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방공호 대피가 일상이 된다. 남자들이 전선으로 이동한 동안 여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운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다분한 이 작품에서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이혼녀이자 싱글맘인 사십 대 여성 스텔라는 영국계 아일랜드 귀족 출신이다. 그녀의 아들 로더릭은 옥스퍼드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입대한 상태다. 현재 그녀는 됭케르크 전투 생존자인 로버트 대위와 사랑하는 사이다. 해리슨이라는 수상쩍은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스텔라는 영국 첩보국 소속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해리슨으로부터 협박인지 구애인지 모호한 거래조건을 듣는다. 그는 스텔라에게 로버트가 국가를 배신한 첩자이므로 그를 구하고 싶다면 그를 배신하고 자신을 선택하라고 위협한다. 그녀는 로버트를 구하기 위해 영국을 배신하고 나치에 부역하거나 아니면 로버트를 배신하고 영국에 충성심을 보여주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다. 어느 편에 선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배신의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처한다. 성적 거래를 통해 한 남자를 배신하거나 아니면 국가를 배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시 가부장제 국가에서 여성은 이중적으로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한다. 허무하게도 로버트는 해리슨이 의심하는 그런 일을 했다고 순순히 인정한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됭케르크에서 자국 군인들을 희생시켰다. 생지옥에서 생환했지만 다리를 절게 된 로버트에게 그처럼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배신이 일상이 된 영혼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으로 연결시키는 이야기기도 하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루이 로이스는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고 남편 톰은 징집되었다. 고향을 떠나 런던이란 낯선 도시에 홀로 남은 그녀는 외롭다. 공장노동자로 자립하면서 나름의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한다.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스텔라가 그녀에게는 삶의 모델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녀의 세련되고 우아한 외모와는 달리 스텔라 또한 도덕적 결함이 드러난다. 아무렴 어떠랴, 결함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해리슨과 루이는 첫 장에서부터 공원의 야외 음악회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냉담한 남자에게 소위 말해 들이대는 루이의 ‘집요함’과 해리슨의 모멸적인 ‘무례함’은 서로의 반감에도 일종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반감을 가진 적대적인 사람들의 신경조차 신비스럽게도 서로 연결된다. 해리슨은 전쟁이 내면의 악이 외화된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루이는 전쟁을 하는 것도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처럼 두 사람의 신경줄은 반감으로 연결된다.  


죽은 사람들의 존재감이 런던 전역에 드리워진다. 전시라서 오히려 “산 자와 사자들 사이에 벽이 얇아지듯, 산 자와 산 자들 사이의 벽도 덜 단단해진다.” 망자들이 망자인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익명성 속에 있을 때이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애도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거리 모퉁이에서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그날 밤 죽지 않기를, 더욱이 익명으로 죽지 않기를 빌어 주며 〈굿 나이트, 행운을 빌어〉라고”(159쪽) 친절하게 말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쟁이 허락하는 역설이었다.    


예전에는 스텔라가 먼저 보였다면 이번 읽기에서는 루이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루이는 이 작품에서 야무지게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친구인 코니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여성이다. 그녀는 다른 군인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남편 톰을 사랑한다고 느낀다. 고아에다가 배운 것이 없었던 그녀에게는 신문이 성경을 대신한다. 그녀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신문에 따라 그녀는 여성 노동자이자 군인의 외로운 아내가 된다. 전쟁고아이고 런던을 활보하는 보행자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민주 시민이자, 영국 여성이다. 신문은 하층 노동자인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로버트 켈웨이 대위가 자살같은 추락사를 하게 되자 해리스도 자취를 감춘다. 그는 어디서나 나타났다 사라지고 어디에나 있으면서 있지 않는 존재다. 이처럼 유령 같은 인물이 해리슨이므로 스텔라에게 느닷없이 다시 나타난다고 하여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존재다. ‘우리’는 로버트가 이적 행위를 했다는 해리스의 말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면 해리스의 성은 로버트로 밝혀진다. 로버트 켈웨이와 해리스 로버트는 서로의 더블인 셈이다. 이혼한 스텥라의 전남편은 빅터 로드니이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혼 후 3주 만에 죽었다. 빅터의 이름을 가져가는 사람은 루이다. 


전시에 루이가 보이는 행동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만한 행동이다.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여성들의 부도덕성 운운하는 기사로 말이다. 루이는 톰이 아닌 익명의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전쟁이 사람들을 죽인다면, 루이는 새로운 생명을 사랑으로 낳고 키운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기이하게도 토마스 빅터라고 짓는다. 망자가 망자인 것은 익명성 때문이라는 화자의 말을 상기한다면, 죽은 자들은 산 자의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기억되고 연결된다.


스텔라의 유약한 아들 로더릭은 ‘진정한’ 군인으로 장교가 되고, 아버지 빅터의 사촌 형인 커즌 프랜시스로부터 아일랜드에 있는 마운트 모리스 저택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과거 전통은 미래 세대에게 부담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물려받을지는 전적으로 로더릭에게 달려 있다. 전쟁으로 과거의 영국계-아일랜드 귀족들은 몰락했고 관 뚜껑에 못질까지 확실하게 했다. 로더릭에게 아버지들인 빅터, 커즌 프랜시스, 로버트 세 사람은 구시대의 귀족이었고 전부 죽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약속은 이제 성인이 된 취약하고 친절한 로더릭과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동물적인 우아함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여성 루이에게서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