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0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의 사회적 역할

저자소개

조은숙
그림책 연구자

오늘 제가 발표하기로 한 주제는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그림책의 연구 접근 방법에서 사회적 접근법이 있습니다. 그림책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즉 정치·사회·교육적인 환경과 인쇄, 출판, 도서 환경, 역사 등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림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언급하는 주제를 들여다보는 데는 가장 유효한 접근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큰 범위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 위의 사회적 접근법을 취하면서 제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이기에 개인적인 견해를 좀 더 내세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또한 그림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사회적 의제를 지닌 그림책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국 그림책 역사 속에서 사회적 성격을 띤 그림책들


1) ‘그림으로 기록’*하라 - 1980년대 전후


   *곽영권. 부천국제포럼 배포자료(22.10.19.) 에서 사용된 용어를 그대로 차용함. 


한국 그림책에서 사회적 역할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담은 그림책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김민기 지음, 정용기 꾸밈, 한울, 1987와 『꽃동네 이야기』곽영권 글·그림, 꽃동네출판사, 1991를 들 수 있습니다. 『아빠 얼굴 예쁘네요』는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가 1980년대 탄광촌 아이들의 일기와 글을 바탕으로 쓴 내용을 정용기가 그림과 점토인형 이미지 등을 활용하여 화면을 꾸민 책입니다. 『꽃동네 이야기』는 꽃동네를 배경으로 한 걸인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의 실천적 사랑을 담은 책입니다. 이 두 책은 1980년대의 그림책이 그림으로 기록을 하는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이 책들은 작가가 탄광촌에서 겪은 경험이나, 2년 여 간의 ‘꽃동네’에 대한 취재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그림책이 독립된 매체로서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여러 사회현실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방법으로 차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예술을 통한 사회적 참여 방식으로서 채택된 그림책 – 1990년대


1990년대는 본격적으로 우리 창작 그림책이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민중미술운동을 하던 작가들이 우리 그림책 작가로 많이 유입되었던 시기입니다. 그림책은 생업으로서의 역할을 충족하면서도 예술을 통해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습니다. 권윤덕, 김종도, 김환영, 정승각, 정유정, 양상용, 이억배, 조혜란 외의 많은 작가들이 199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강아지똥』1996 『만희네 집』1995 『솔이의 추석 이야기』1995를 비롯하여 한국 그림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러 그림책들을 작업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일루의 볼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네 정서가 살아 있는 ‘뿌리 있는 그림책’을 통해서요.” (정승각 인터뷰. 중앙일보. 1993. 10. 30.)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민중들의 삶 속에 뿌리 내린 민중 예술가를 원했다. 건강하고 대중과 함께 소통하는 예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억배. “전통문화와 나의 그림책 ” 『그림으로 말하다』 홍시커뮤니케이션. 2009)


이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 미학과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현실에 대한 발언과 참여로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고민하였습니다.(조은숙. “우리나라 그림책 100년-우리 그림책의 정체성을 탐구한 1990년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도서관이야기. 2011월 10월호) 사회변혁을 꿈꾸는 작가들의 그림책에로의 합류는 이후 본격적인 한국 창작 그림책의 시대가 열리는 것과 맞물리면서 그림책계를 풍성하게 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동시에 1990년대~2000년대 한국 그림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였습니다.


3) 한중일 평화그림책시리즈 – 2000년대 


2005년, 어린이들에게 평화의 의미와 가치를 전하는 ‘평화 그림책’을 만들자는 일본 작가들의 제안을 계기로 한중일 3개국의 작가 12명이 모여 그림책을 만들게 된 것이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결과, 첫 작품으로 2010년 권윤덕 작가의 『꽃할머니』사계절가 출간되었으며, 2016년까지 총 11권의 그림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중 한국 작가의 책으로는 이억배 작가의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사계절, 2010, 권정생 글, 김환영 그림의 『강냉이』사계절, 2015/개정판 2018, 변기자 글, 정승각 그림의 『춘희는 아기란다』사계절, 2016가 있습니다. ‘평화그림책 시리즈’ 작업은 그림책 작가의 사회적 활동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국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며, 공동의 가치로서 전인류적 차원의 보편적 가치를 그림책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현대사의 아픔을 본격적으로 담아내는 매체로서 그림책의 사회적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4) 사회적 이슈를 담은 다양한 그림책이 양산됨 – 2010년대 ~ 현재


2010년대 이후는, 한국 그림책의 작가군이 풍성해짐에 따라 자기만의 개성과 문제의식을 그림책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여러 장르의 다양한 이슈의 그림책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조원희 작가는 탈모스트레스로 갈등하는 현대인을 담은 『중요한 문제』이야기꽃, 2017, 지구온난화로 인해 터전을 잃는 문제를 다룬 『얼음소년』느림보, 2009 등을 통해 큰 범위의 이슈를 선언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이야기로 친숙하게 다룹니다. 권정민 작가는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보림, 2016,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문학동네, 2019등의 작품에서 관점 바꾸기를 통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삶을 낯설게 보게 하고 풍자합니다. 전미화 작가는 『달려라 오토바이』문학동네, 2015, 『달 밝은 밤』창비, 2020, 『다음 달에는』사계절, 2022 등을 통해 경제적 요건으로 해체되기 쉬운 현대의 가족과 이 안에서의 실존 문제를 조명합니다. 김동수 작가는 『잘 가, 안녕』보림, 2016을 통해 로드킬로 훼손된 생명들에 대한 위로를, 『오늘의 할 일』창비, 2024에서는 환경오염으로 훼손된 하천 안에서 벌어지는 물귀신들의 자정 활동을 위트 있게 그려서, 그림책의 세계관을 확장시킵니다. 고정순 작가는 『가드를 올리고』2017, 만만한책방를 통해 만만치 않는 세상에 맞선 치열한 생존 의지를 담았고, 같은 작가의 『나는 귀신』불광출판사, 2020에는 소외와 고립감을 견디고 살아내는 법이 담겨 있어 씁쓸함을 남깁니다. 판타지를 통해 인간이 야기한 여러 문제, 특히 욕망을 위해 다른 생명이나 환경을 파괴하는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림책도 있습니다. 이기훈 작가의 『양철곰』리잼, 2012, 『09:47』글로연, 2022, 소윤경 작가의 『레스토랑 sal』사계절, 2013, 『콤비』문학동네, 2015 등의 그림책들입니다. 이들 그림책에는 종말 뒤에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그려지지만, 이를 구원하는 어린이 혹은 탈인류적 연대라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담겨있습니다. 또한 여성주의적 시각이 담긴 그림책들도 만들어졌는데, 홍지혜 작가의 『L부인과의 인터뷰』엣눈북스, 2018, 오소리 작가의 『노를 든 신부』이야기꽃, 2019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한편, 그림책 창작과 실천 활동이 밀접한 연결성을 지닌 그림책들도 등장합니다. 김규정 작가 의 『밀양 큰 할매』철수와영희, 2015는 10년 동안의 밀양의 송전탑 반대 운동이 담겨있고, 최협 작가의 『야생동물 구조 일기』길벗어린이, 2016는 직접 야생동물 구조 활동을 해온 작가의 경험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연장선으로 그림책에도 고스란히 작가의 삶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빈 공장의 기타소리』창비, 2017는 작가가 해고 노동자들이 싸움을 하고 있는 현장에 어쩌다 작업실을 두게 되면서, 그들과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일상의 감정을 나누면서 나온 그림책입니다. 『선아』이야기꽃, 2018에는 고단한 취준생의 삶이 그려집니다. “살아남고 싶다”는 초라하고 가진 것 없는 우리 사회 청년의 모습이 아리게 다가옵니다. 


이처럼 지금의 그림책에는 동시대적인 아픔과 문제의식 등이 예리하고도 아프게, 때론 따뜻하게 담겨집니다. 최근 그림책들은 섣불리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대안을 간단히 제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린이를 고려한다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긍정적 해결로 맺음을 하려던 그림책들과 최근의 그림책들은 너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5) 민주인권그림책프로젝트 – 2024년


가장 최근에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림책에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는데 있어 좀 규모가 있는 프로젝트이기에 ‘민주인권그림책프로젝트’를 소개할까 합니다. ‘민주인권그림책시리즈’는 곧 개관될 ‘민주주의운동기념관’의 전시 콘텐츠 마련을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상징성을 지닌 ‘남영동 대공분실’이 기념관으로 재탄생되면서 민주와 인권을 주제로 하는 그림책 창작 프로젝트가 기획되었습니다. 2022년~2024년까지 열세 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하여 총 8권의 그림책이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프로젝트의 의미 중의 하나는, 국가 차원의 전시 공간에서 그림책이 콘텐츠로 채택됨으로서, 예술 장르로서 그림책의 위상을 고양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민주 인권을 주제로 한 그림책들이 작가 개인 차원의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시리즈로 묶이면서 한국 현대사의 기억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동시대적인 인식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무엇보다 그림책이 가진 높은 전달력이 부각되었는데, 민주 인권 이슈에 대해 가족과 어린이까지 접근성을 넓히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받습니다. 또한 그림책이 가진 여러 매체로의 원활한 확장성은 다소 무거운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활동들에 폭넓게 활용될 것입니다.


2. 그림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1) 작가들이 생각하는 그림책의 사회적 역할 (제2회 주엽어린이도서관 그림책 세미나)


지난 2022년 11월 주엽어린이도서관에서 ‘그림책과 사회-그림책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림책의 사회적 역할을 언급하기 위해 이때 발제를 맡아준 권윤덕, 김규정, 이기훈, 유현미 작가가 언급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이하 서술된 글 참고자료: ‘그림책과 사회-그림책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 제2회 주엽어린이도서관 그림책 세미나 발제집. 고양특례시·그림책협회. 23.11.23)


권윤덕 작가는 그림책작가로서 사회적 책무와 관련하여, 그림책은 복제를 통해 대량 생산되고 유통이 되는 기본적 속성을 지님으로 인해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다고 보았습니다. 그림책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해서, ‘그림책 작가가 기억의 매개자로서 그림책이라는 재현물을 만들면, 독자는 이에 감응함으로써 집단적 감정이나 행동을 표출하고 이것은 다시 기억의 주체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의 구조를 갖게 됨’을 언급하였습니다. 『꽃할머니』의 경우 처음에는 책을 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에서는 책을 읽으며 수업을 하고, 시민단체, 도서관과 많은 성인 독자들이 이야기를 퍼 나르고, 연극,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그림책 작가로서 사회적 의무를 절감하였다고 합니다. 


김규정 작가의 경우는 ‘핵발전소, 기후위기, 사회적 이슈 등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 매개체로서 그림책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기훈 작가는 ‘그림책작가는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작품은, 의도가 있던 없던 삶의 토대가 되는 시공간의 수많은 작용이 만들어낸 결과이기에,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림책은 사회의 작용과 반작용이 작동하는 역학의 반영이자, 지나온 역사와 집단 무의식 등의 다양한 힘이 담긴 세계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림책을 비롯한 콘텐츠는 소비하는 형식과 방식에서 다양한 접근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최근은 그림책을 둘러싼 매체 환경의 변화 속에서 그 모습이 달라져야 함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귀결은 그림책의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다양성의 세계는 예술 자체를 풍성하게 하고,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작은 힘들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현미 작가는 어떤 의미로든 사회를 담고 있지 않은 그림책은 없다면서 삶의 기록으로서 그림책을 언급합니다. 그의 그림책은 실향민인 아버지의 노년 말기를 그림책으로 담고, 민주주의를 위한 촛불 시위에 참여하고, 텃밭을 일구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림책은 재미있고 의미 있는 공공재로서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랑과 연대와 평화를 향한 구체적인 실천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편, 엄혜숙 연구자는, 작가가 자신의 느낌과 문제의식으로 작품을 표현한다면, 독자가 의미를 읽고 해석할 때, 작가와 독자를 연결해주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증폭시켜주는 역할로서 비평 및 연구의 역할이 필요함을 언급합니다. 


2) 기억서사를 담는 매체로서 그림책의 의미 살펴보기


지금까지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작가들의 몇 가지 언급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기억의 공유매체로서 그림책의 역할을 검토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상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다룰 때, 최근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기억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역사가의 관점에서, 기억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역사의 규제를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개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로서의 기억은 기존의 역사를 넘어서 과거의 다양한 사건과 사태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재현방식으로 그 역할을 인정받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림책이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을 기억의 양태로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 한국전쟁, 위안부문제, 분단, 5.18민주화운동 등 한국의 주요 사건을 다룬 그림책 27권을 모아서 살펴보았더니아래 표1 상당수가 기억을 매개로 서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글에 있어서 1인칭 회고 시점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서사에 몰입과 공감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리라 예상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 기억 서사의 주인공은 어린이와 여성에 집중되었는데, 그림책은 기존 남성중심적 서사 속에서는 쉽게 주체로 등장하기 어려운 어린이와 여성의 관점을 중심에 두고 서술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표 1. 한국 주요 현대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담긴 그림책(배경이 되는 사건 연대순)


한편, 그림책은 사적 기억을 다루지만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곧잘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림책의 곁텍스트peritext를 활용하는 것인데, 사건의 배경지식 제공, 서사의 주인공이 실제인물임을 밝히기, 허구에 이야기가 실제 벌어진 사건에 기반임을 밝히기, 경험이나 답사 등 실제 체험요소 드러내기 등 다양한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그림책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적 기억을 담는데, 이것이 등장인물의 개인적인 사적기억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일 때, 그것은 그림책을 통해 ‘집단기억’으로 전환한다는 겁니다. ‘집단기억memoire collective’이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가 제안한 용어인데, 기억이란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기 때문입니다. 알박스에 의하면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은 그 기억을 바탕으로서 집단정체성을 만듭니다.** 한편, 아스만Aleida Assmann은  집단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징물, 도상, 묘비, 사원, 기념비, 제의, 축제 등과 같은 다양한 기억문화적 형식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습니다.양재혁. 기억은 역사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한울아카데미. 문화사학회 엮음. 2017. 15-40 그에 근거해 봤을 때 동시대 혹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징, 의미, 도상, 텍스트를 담은 그림책은 기억문화를 담은 효과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림책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다음 세대의 기억의 계승에 관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건의 경우, 제주에서 현재 다수를 차지고 있는 세대는 직접 경험을 한 1세대를 지나서 사건 이후에 태어난 세대입니다. 특히 그 증손자격인 4~5세대가 함께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기억의 계승은 세대를 이양하며, 기억과 망각이 선택적으로 반복하면서 일어나고, 이것은 집단적인 회상과 상징화된 문화적 표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세대가 4.3사건에 대한 정체성과 담론을 형성하는 데 기반이 됩니다. 이때, 그림책은 개별 기억이 서사화되는 중요한 장치이며, 이를 타자와 공유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림책에 담긴 기억서사는 사회적 기억, 즉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참여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기억의 계승과 관련해서는 모리스 알박스(M. Halbwachs, 1980)의 이론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 그는 기억의 사회적 조건과 형성 구조, 기능 방식을 규명하였다. 이를 통해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기존 시선에서 탈피하여 기억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며, 그에 따라 기억을 일정한 틀로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현혜경, 김석윤, 김은정. 제주4.3사건 기억의 후체험세대 계승에 관한 연구. 민주주의와인권. 2020. 제20권 3호 99-162)


*** 연구에 의하면, 4.3사건의 성격을 인식하는데 영향을 미친 방법은 학교의 교육과정이 가장 비중이 높고, 기념관 등 역사현장 방문, 대중매체, 관련 행사, 인터넷 매체, 집안 제사의례 등 순이었다.(현혜경 외, 위 논문) 


3. 몇 가지 남겨진 테마


1) 사회적 기억을 담아내는 데에 있어 그림책 매체의 장점


그림책은 연속된 여러 장면을 하나로 묶는 데서부터 그 (물리적) 속성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그림책 속의 상황이나 장면을 분절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연속성과 맥락 속에서 파악하게 합니다. 아래 두 장의 사진그림1, 그림2은 조선총독부 시절에 촬영된 원산의 백정들과 북청의 다섯 쌍의 부부를 찍은 사진입니다. 언뜻 보면 사회적인 한 집단을 기록한 사진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사진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배를 보다 치밀하기 위한 수집된 자료입니다. 이미지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는데 있어 맥락의 중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이미지는 시대의 의미를 담보하며 그 의미를 재해석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아래의 그림3은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로먼 록웰의 작품인데, 1960년 루이지애나에서 금지되었던 백인 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한 루비 브리지스라는 흑인 소녀가 나옵니다. 주변에 완장을 찬 남자들은 테러로부터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연방 요원들입니다. 애초에 신문에 실렸던 등교 사진을 다시 그림 이미지로 재해석해서 작업한 것입니다. 작가가 원래의 사진 이미지를 어떻게 변형시켜서 의미를 담았는지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처럼 이미지는 그 맥락 속에서 파악하기 전에는 전혀 다른 의도로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림책은 시대 사회적 배경을 담으면서 서사나 메시지를 맥락 속에서 전달하기에 최적화된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1. 원산백정체력측정 - 총독부유리건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 북청부부체력측정 – 총독부유리건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3. 우리가 사는 문제. 노먼 록웰. 1964



2) 동시대 예술과 그림책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항상 동시에 제기되는 것은 바로 그림책의 예술성의 실현입니다. 메시지나 의미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림책은 먼저 예술로서 다가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두 권의 그림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김은희의 『1km-오늘도 삶을 짓는 중입니다』2019, 단추는 동네 관찰기에서 시작해서 특정한 공간을 배경으로 확장되는 작가의 인식의 흐름이 드러나 있는 책입니다. 역곡역으로 뻗은 길 양켠 1km 남짓의 거리를 관찰하면서 작가는 동일한 공간에 대한 인식의 층위가 다층화됨을 느낍니다. 건물과 거리, 내부 공간에 대한 깊이가 확장되고 그들 간에 관계성이 포착되며, 분절된 것들이 서로를 간섭하고 연결됨을 포착합니다. 또한 재건축 등의 요인으로 도시가 끊임없어 변화하는 모습 역시 포착합니다. 이 책은 관찰 일지이지만 보이는 대로 담은 것이 아닌, 같은 곳을 수없이 반복해서 보고 시간을 투영하여 관찰하면서 달라지는 작가의 의식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그리하여 작가는 마침내 “현재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대한 서사는 나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무관심할 수는 있어도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무관하지 않음 자체가 작업의 주된 표현 주제였다는 것을 지금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김은희. 『1km-오늘도 삶을 짓는 중입니다』 작가 후기에서라고 말합니다. 대상에 작가의 인식의 변화를 담아 표현된 그림책을 독자들은 여러번 반복하고 주의를 기울여 봄으로써 답장을 할 것입니다.


또다른 한 권은 자바카 스텝토의 『빛나는 아이』자바카 스텝토, 『빛나는 아이-천재적인 젊은 예술가 장 미셀 바스키아』, 이유리 옮김, 2018, 위즈덤하우스입니다. 뉴욕에서 태어나 대담하고 도전적인 그림 작업을 펼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 장 미셀 바스키아를 다룬 인물이야기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바스키아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기법입니다. 바스키아의 자유로운 예술 정신을 담아 그림책은 여러 가지 성격이 다른 이미지들에 대해 꼴라주적인 결합을 시도하고, 정치적이고 메시지성 강한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연결되어 그림책에 타이포그래픽을 도입하였으며, 뉴욕의 거리에서 성장한 바스키외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뉴욕의 도서관과 브루클린 거리에서 버려진 나무판자에 책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책 작업 자체가 바스티아에 대한 오마주인 것입니다.


이 두 권의 작품은 그림책 예술성의 실현을 위한 많은 그림책 작업 중에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이것은 권윤덕 작가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미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라고 언급한 것(권윤덕. ‘그림책에 사회 문제를 담다’, 제2회 주엽어린이도서관 그림책세미나 발제집. 고양특례시·그림책협회. 23. 11. 23.)처럼 여전히 많은 작가들의 과제일 것입니다.


3) 그림책이 지향하는 것


그림책 『꽃할머니』권윤덕 글·그림, 사계절, 2010는 피해자 시점으로 위안부를 다룬 책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용맹호』권윤덕 글·그림. 사계절. 2021에서 가해자 시점을 그립니다. ‘민주인권그림책프로젝트’ 그림책 중 남영동 대공분실을 다룬 그림책 『건축물의 기억』최경식·오소리·홍지혜 글·그림, 사계절, 2024에서도 그림책은 고문으로 평생 치유되지 않는 상흔을 지닌 피해자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목소리를 같이 담았는데, 결국 그림책은 지금까지 피해자와 가해자, 이념 대립 등의 갈등을 떠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 인류애, 연대 등을 추구해 왔음을 대변합니다. 그림책은 희극이던 비극이던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많은 그림책이 독자 중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이를 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문학이요 예술이기 때문이기 아닐까 합니다.  


4. 나오며


지금까지 사회적 이슈를 담은 그림책을 중심으로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우리 그림책에 담긴 양태를 살펴보면서 그림책의 이미지는 맥락 속에서 다뤄지기에, 특히 사회적 의제를 다룬 그림책의 경우 책 속의 행위자나 사건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하며, 그림책은 페리텍스트 등의 다양한 장치를 통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전략을 가질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책의 사적 기억은 한 사회에서 전승되고 새로운 담론으로 남을 집단기억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그림책은 집단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는 매체이자, 다음 세대에게 계승하고, 사적 기억을 공적 기억을 전환하는데 있어 매개자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2025년 4월 8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세마홀에서 열린 「2025 그림책의 해 제2차 포럼: 나는 그림책 작가입니다」에서 발표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