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0

김중미 에세이

저자소개

저자 · 김중미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 인천의 가난한 마을 만석동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기찻길옆공부방’을 열고 정착했다. 2001년 강화의 시골로 이사한 뒤 강화에도 공부방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강화와 만석동을 오가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공부방 프로그램이 문화 예술 활동으로 확장되면서 이름을 ‘기찻길옆작은학교’로 바꾸었다. 2000년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창비 ’좋은어린이책’ 원고 공모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지은 책으로 동화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똥바다에 게가 산다』 『꽃섬 고양이』, 청소년소설 『조커와 나』 『모두 깜언』 『나의 동두천』, 그림책 『모여라, 유랑인형극단!』 『6번길을 지켜라 뚝딱』, 에세이 『다시 길을 떠나다』 『꽃은 많을수록 좋다』 등이 있다.

프롤로그


엄마, 내가 누구야?



첫딸을 낳았을 때 엄마가 손녀를 보며 말했다.


“너는 딸한테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 자주 해줘. 자주 안아주고, 입맞춤도 해주고. 내가 우리 엄마한테 배우지 못해서 너희한테도 그렇게 못 했어.”


동화나 소설 속 절절 끓는 모성애는 우리 엄마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모성애를 아름답게 이상화한 시나 소설을 읽으면 거부감이 들었다. 언제 엎어져도 괜찮은 너는 품을 가진 존재, 어느 때나 기댈 수 있는 강인한 존재가 어머니의 흔한 표상이라면, 우리 엄마는 세상이 말하는 어머니상과 어딘가 달랐다.


10여 년 전,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 반대 행동을 하기 위해 카약을 타고 바다로 나간 적이 있었다. 바다를 무서워하는 내게 평화 활동가가 말했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다에 몸을 맡기라고. 머릿속으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가 어머니 품이라면 나는 두려움 없이 몸을 맡길 수 없었다.


엄마에게서 한없이 넓은 바다와 같은 품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 바다를 내주지 못한 자책으로 힘겨워했다. 언젠가 엄마는 자신도 그런 엄마를 갖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안전한 바다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경우바르고, 자녀들에게도 지공무사사해서 언제든 조언을 구하고, 지혜를 빌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주는 사람이어서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 엄마가 인천으로 와서부터 우울하고 히스테릭해졌다. 몸도 자주 아팠다. 엄마는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엄마가 겔포스 대신 병원의 신경성 위염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건 전국민의료보험이 시행된 뒤였다.



2018년 이후 인지장애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엄마는 기억을 하나씩 잃어갔다. 어쩐 일인지 ‘중미’와 사위인 ‘단비 아빠’를 가장 오래 기억했다. 물론 중미라는 이름과 당신 앞에 앉은 사람을 일치시키는 데 늘 시간이 필요했다.


2023년 여름, 탈장 수술을 위해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누구야?”


“중미지. 내 딸, 내 소중한 딸이지.”


“엄마, 내가 그렇게 소중한 딸인데, 왜 평생 그런 말을 않고 살았어?”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는 어떤 딸이었어?”


“힘든 딸.”


“내가 엄마를 힘들게 했어?”


“아니, 내가 힘들게 했지. 너는 늘 나를 이렇게…… 가르쳐주고, 도와주고.”


엄마는 잠시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엄마도 우리 걱정 말고 건강하게만 살아. 백 살까지 살아.”


“세상에! 그렇게 오래?”


“응. 그렇게 오래 살아.”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못 해도 괜찮아. 그냥 여기 이렇게만 있어줘.”


엄마가 장난스럽게 말에 리듬을 실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엄마는 자신의 인지장애를 ‘인지’했다. 그래서 자신이 바보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2024년 1월에는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 왜? 왜 그런 말을 해? 왜 죽고 싶어?”


“나는 모든 걸 못 해요. 바보 같은 내가 미워요.”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가 왜 아무것도 못 해. 엄마, 노인들은 이 나이 되면 다 쉬는 거야. 그리고 아무것도 못 해도 괜찮아. 그냥 이렇게 우리 곁에 계시기만 해도 되는 거야.”


엄마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찾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내가 바보 같아요. 고맙다는 말밖에 못 하잖아요.”


나는 기억을 잃은 엄마가 “고맙다, 예쁘다, 멋지다”라고 좋은 말만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머릿속에 그 말만 떠오르는 게 답답한 것이다.


“엄마,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내 질문에 엄마 표정이 굳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나는 말없이 엄마 손을 잡았다.


인지장애가 심해진 뒤에도 엄마는 상황에 맞는 말을 하려고 늘 심사숙고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인지장애가 온 이틀도 ‘본래의 나’를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계신 요양원에 온 지 3년이 넘었지만, 요양보호사님들은 여전히 엄마를 “착한 미자 씨” “예쁜 미자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때때로 수저를 드는 것조차 잊은 엄마한테 “미자 어르신 같으면 혼자서 열 명도 돌볼 수 있어요. 어쩌면 말 한마디도 그렇게 예쁘게 하시는지. 기저귀를 갈아드려도 고마워요, 식사를 도와드려도 고마워요 하세요.” 한다.


사람들은 엄마가 착한 치매라며 다행이라고 한다. 엄마의 기억 속엔 원망과 분노의 말보다 사랑스러운 말이 더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그 말만큼이나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할 수 없죠. 뭐” “할 수 없지” 그 말에 담긴 엄마의 체념과 힘들었을 삶이 떠올라 가슴이 저리다.


엄마는 우리를 만나면 뒤죽박죽된 말투며 속에서 알맞은 낱말을 찾느라 애를 쓴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건 괴롭다. 엄마에게 묻지 못한 것이, 듣지 못한 것이 아직 너무 많은데 나의 게으름과 무심함으로 다 놓치고 말았다. 엄마의 기억이 엄마 자신조차 꺼낼 수 없는 곳으로 깊이 숨어버렸다.



엄마는 나도 엄마가 되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을까. 엄마는 내게 자신과 다른 좋은 엄마가 되라고 했지만, 나 역시 그 바람처럼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일이 먼저였던 외할머니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오로지 자녀만을 위한 엄마로 살고자 애썼던 우리 엄마와 달리, 나는 일하는 엄마로 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당시 신여성이었던 외할머니의 처절한 몸부림도, 자녀들을 위한 완벽한 엄마가 되려던 엄마의 노력도, 일과 양육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했던 나의 안간힘도 홀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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