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4

도종환 시집

저자소개

저자 ·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신석정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인간처럼 이해하고, 인간을 자연처럼 이해하는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시와 산문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고 맑은 통찰의 눈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시집으로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 《해인으로 가는 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너 없이 어찌 내게 향기 있으랴》 등이 있습니다. 동시집 《누가 더 놀랐을까》, 동화 《나무야, 안녕》, 그림책 《도종환 시인의 자장가》, 《병아리 싸움》 등을 냈습니다.

이월


입춘이 지나갔다는 걸 나무들은 몸으로 안다 

한문을 배웠을 리 없는 산수유나무 어린것들이 

솟을대문 곁에서 입춘을 읽는다 

이월이 좋은 것은 

기다림이 나뭇가지를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동쪽에는 허벅지까지 습설濕雪이 내려 쌓여 

오르고 내리는 길 모두가 막혔다는데 

길가의 나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치다 

삼월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월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무엇이 있다 

녹았던 물을 다시 살얼음으로 바꾸는 밤바람이 

위세를 부리며 몰려다니지만 

이월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 

그때마다 불이 빨갛게 언 나를 

나는 순간순간 이월로 옮겨다 놓곤 했다 

이월이 나를 제 옆에 있게 해주면 위안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월이 슬그머니 옆에 와 내가 

바라보는 들판의 푸릇푸릇한 흔적을 함께 보고 있다





소원


올해도 소한 대한 지나며 폭설 퍼부을 것이다 

사나흘 눈 쏟아져 산짐승 다니는 길도 

사람들이 세상으로 낸 길도 다 지워지는 날 

내가 찍은 내 발자국 데리고 고요도 데리고 

더 깊은 곳에 깃든 내 집 찾아가고 싶다


올해도 청명 곡우 지나면 꽃사태 나고 

남쪽에선 매화 산수유 벚꽃이 지천으로 필 것이다 

꽃 보러 가고 싶은 마음 눌러 앉히고 꽃출석부 들고 나가 

뒤뜰에 오종종 핀 봄맞이꽃 주름꽃 꽃다지 

출석 부르며 내 집 마당 먼저 꽃교실로 가꾸고 싶다


올해도 폭우 쏟아져 도시가 무릎까지 젖고 

천둥과 번개의 번쩍이는 채찍이 

인간의 마음과 캄캄해진 하늘을 쩍쩍 갈라놓곤 할 것이다 

그때마다 오만과 허세와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가장 겸허한 언어로 기도하고 싶다


올해도 비명 소리 아우성 소리 골목골목 넘칠 것이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외면하지 않아야 할 목소리 있을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 들을 줄 아는 귀와 

균형과 중정中正의 지혜를 갖게 해달라 간구하고 싶다


올해도 가을 오면 굴참나무 잎은 지고 쓸쓸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한 장의 낙엽처럼 우주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순간순간이 은총이었던 날들과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마른 얼굴로 하늘 올려다보고 싶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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