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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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퍼질 대로 퍼져라
크게 호흡을 가다듬자 트럭 안에 고여 있던 딸기향이 훅 끼쳐왔다. 을주는 찬 손을 비비며 달콤한 향을 들이마셨다. 대시보드 위에 벗어 놓은 나일론 장갑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오전 내내 을주는 그 장갑을 끼고 잘 익은 딸기를 얕은 대야에 옮겨 담았다. 딸기 농장에서 일하며 매일 딸기에 둘러싸여 살았지만,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과일의 향기를 맡으면 새삼 감미로운 기운에 긴장이 풀렸다. 불행이 찾아왔다가도 마음을 순하게 바꿔먹고 돌아갈 것만 같달까.
을주는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져 애가 탔다. 트럭 밖은 캄캄했고 창유리에는 성에가 끼어 시야가 뿌옜다. 을주는 누군가가 트럭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위협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왜 그런 망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짓을 저지르는 범죄자에게도 코는 있을 것이다. 코가 있다면 이 딸기향을 맡을 수 있겠지. 콧속의 점막을 은근하게 잡아당기는 달콤한 내음을 맡으면 못된 짓을 10만큼 하려다가도 3이나 2 정도만 하겠지.
을주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 노력했다. 잘되지 않았다. 시동 장치가 먹통이었다. 한파에 배터리가 방전된 건지 몰랐다. 을주는 실내등 버튼을 찾기 위해 손으로 천장을 더듬었다. 다행히 불이 들어왔고 전조등도 멀쩡한 걸 보니 전기 문제는 아니었다. 을주는 다시금 키 박스에 꽂힌 열쇠를 비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이고 오복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오복이를 떠올리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그 순간 말 울음 같은 소리를 길게 내며 시동이 걸렸다. 을주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조수석 헤드를 붙잡았다. 허리에 찬 공구 벨트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휴대전화 알람이었다.
〈욕+받이〉 라이브 한 시간 전.
을주는 트럭을 후진시키며 거침없이 흙길을 내려갔다.
집에 도착한 을주는 공구 벨트를 벗고 오복이에게 말했다.
“오복아, 어야 가자. 어야끈 어딨어?”
을주는 오복이와 산책할 때 쓰는 리드줄을 ‘어야끈’이라 불렀다. 오복이를 리드하기보다 같이 나들이 가는 시간이라서였다. 도베르만 성견인 오복이가 어야끈을 입에 물고 오자 을주가 오복이의 아몬드색 가슴을 어루만졌다. 한겨울의 늦은 저녁, 바깥바람은 맑고 끝이 매서웠다. 을주와 오복이는 어둑해진 해안가로 산책에 나섰다.
해변에도 불투명한 먹색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을주는 달을 올려보며 이따금 오복이의 돌진을 멈춰 세웠다. 간조를 기다린 오복이는 질퍽한 흙에 코를 들이밀며 물위를 첨벙거렸다. 바닷물이 빗살무늬를 그리며 먼바다로 끌려갔다. 해안가 남쪽에는 붉고 우람한 침식 바위가 솟아 있었고 그 아래 흰 조개껍데기가 둔덕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북쪽에는 듬성듬성한 갯바위 너머로 곰솔에 뒤덮인 옥녀산이 버티고 있었다.
옥녀산은 예부터 살쾡이가 많다고 해서 쾡이산, 근방의 음기가 모조리 모여든다고 해서 태음산이라고도 했다. 그 살벌한 음기를 다스려야 한다며 산중턱에 매부리코처럼 튀어나온 회색 돌덩이를 자지바위라고 불렀다. 을주가 어릴 땐 만물상회 평상에 모여 앉은 어른들이 그 자지바위, 물자지바위라고 소리치며 떠들었다. 을주는 그런 말을 쓰는 어른들의 생김새를 유심히 봐두었다. 저렇게 생긴 사람은 사는 동안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바위를 그렇게 부르는 건 돌이나 풀이나 그것에게나 죄다 예의가 아니었다.
산의 소나무를 밀어 ‘옥녀 치맛길’을 만드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다행히 그 개발계획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대신 눈이 왕방울만한 옥녀 그림과 옥녀에 대한 이야기가 표지판에 새겨져 해변의 길목에 눌러앉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사랑했던 장군에게 버림받아 매일 밤 절벽에 올라 자기 치맛폭을 흔들었다는 전설 어쩌고저쩌고. 옥녀와 장군의 달맞이 콘셉트로 꾸미려 했던 전망 카페는 한동안 벽돌과 패널이 어지럽게 쌓인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엔 삼층집이 덩그러니 자리해 을주의 관심을 끌었다.
처음 옥녀산에 집이 들어선 건 을주가 열두 살 때였다. 젊은 여자 무당이 억센 해송을 벌채한 땅에 돈지랄 건물만물상회 주인인 고모부의 표현이었다을 짓고 살았다. 그 여자는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독한 연기를 내뿜는 소독차처럼 무성한 소문을 꽁무니에 달고 다녔다. 낮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바닷가를 오가다가 보름이나 그믐날 밤이 되면 해안가 조개무덤에서 ‘정성’을 드린다고 했다. 그 여자의 눈짓과 손짓에 따라 나라의 도로가 달라지고 고위직의 모가지가 달랑거린다고도 했다.
“꼭두각시래. 위의 사람들이 아주. 여의도 방송국 꾸정물이 그 여자 귓구멍으로 다 들어간다나? 일부러 알아낼 필요도 없이 지들이 와서 줄줄이 말하곤 한대. 내가 언제 어디에서 이런저런 더런 짓을 한 건데, 잘 좀 되게 해달라고.”
을주는 식당을 하는 이모가 점심 특선 회덮밥에 넣을 깻잎을 썰며 했던 말을 기억했다. 이모는 그 여자가 인맥과 돈맥을 끌어 모아 바닷가의 제사 터를 아예 사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젠 돈 없고 빽 없는 귀신들은 거기 얼씬도 못할 거라고. 그러자 홀에 있는 난로의 연통에서 재를 긁어내던 이모부가 중얼거렸다.
“빽은 무슨, 귀신이 한 많고 사연 많은 게 빽이지.”
그 무렵 을주는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며 옥녀산에서 내려오는 쪽찐 머리의 여인을 훔쳐보곤 했다. 위아래가 세트인 새하얀 운동복에 자줏빛이 감도는 선글라스를 쓴 그 여인은 해넘이에 맞춰 바닷가를 산책했다. 옥녀일까? 을주는 모래 더미에 도사린 유릿조각처럼 사악하게 빛나는 그 여자의 오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자는 마치 자기가 밟는 모래에게 양해라도 구하듯 지긋이 아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눈웃음을 치뜨고 목소리를 바꿔가며 사람을 홀리는 여편네이모의 표현이었다라고 하기엔 심하게 아리따웠다. 술집 여자? 을주는 ‘야하다’는 말과 그 쓰임을 알았지만 그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 다른 말을 떠올렸다. 관능적이라거나 고혹적이라는 말은 아직 초등생의 어휘 사전에 없어서 자신이 아는 가장 이상야릇한 말을 생각해냈다. 그러고는 자기가 떠올린 그 표현이 자지바위란 말과 비슷한 건지 곰곰이 생각하며 물에 흠뻑 젖은 개펄 위를 비틀거렸다. 그 시절 을주는 만물상회 평상에 앉아 있거나 간밤에 한 화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라면이나 부탄가스를 사러 오는 술집 언니들을 마주치곤 했다. 언니들이 건네는 촉촉한 시선에 넋을 놓은 채 언니들이 잡아당기고 간 자기의 뺨을 어벙한 얼굴로 어루만졌다. 첫사랑이었다.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고, 사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지 마주앉아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고 싶고, 또 한편으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사랑이라면, 그 시절 을주는 그 언니들을 사랑했다.
“그만 가, 오복아. 너는 다리가 네 개지, 나는 두 개야.”
을주가 컴컴한 바다를 향해 길게 목을 뺀 오복이에게 사정했다. 우리에겐 아가미가 없고, 바다 밑바닥은 갑자기 푹 꺼지기도 해서 그렇게 무작정 앞으로만 가다간 물귀신이 될 수 있다고. 너 땜에 나 신발 또 젖었다고. 을주는 흥분한 오복이를 달랜 뒤 보름달이 뜬 옥녀산을 올려다봤다. 오복이가 자꾸 바다로 끌려가듯 을주의 시선은 산마루에 있는 삼층집으로 이끌렸다.
왜 저 집엔 늘 사연이 있어 보이는 여자가 사는 걸까.
바닷바람에 몸통을 뒤틀며 자란 고목들이 빛이 새어나오는 유리창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끔했던 외벽은 곰팡이가 슨 건지 희끄무레한 얼룩에 뒤덮였고, 오늘처럼 달이 차오른 날에는 붉은 부분이 으스스하게 보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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