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혜 SF 동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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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마른 꽃잎과 같다
손끝에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감긴다.
소녀는 계속 말없이 눈을 감고 있다. 손이 덜덜 떨렸으나 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쥔 머리카락을 땋으려고 노력한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간다. 긴장했구나? 소녀가 웃으면서 말하는데, 너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녀의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음성이 삭제되고 그 내용만 머릿속에 입력된 것 같다. 하지만 너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라고 겨우 중얼거리자 소녀는 답이 없다.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팔목에 감긴 머리끈을 들어 소녀의 머리카락을 고정한다.
너는 정갈하게 땋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소녀의 목덜미가 지나치게 가늘고 하얗다고 생각한다. 너는 너도 모르게 그 새하얀 걸 움켜쥔다. 아, 느껴진다. 맞닿은 감촉은 부드러운 피부가 아니다. 경추의 두둘두둘한 굴곡이 손아귀에 잡힌다. 소녀가 고개를 기울인다. 네 손등에 턱이나 뺨을 기대려는 것처럼. 너는 네 눈을 덮은 환상이 한 겹 걷어졌음을 눈치챈다. 그러나 소녀는 피부와 근육이 없는 목을 뒤로 꺾어 보거나, 무시무시한 피골로 변해 너를 땅 밑으로 끌어당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아직 네 눈에 벗겨지지 않고 달라붙은 비극의 필름이 몇 장 더 남았다는 듯.
너는 기쁘다. 이런 상태인 소녀를 그대로 두고 도망칠 생각 따위 없는 너의 마음을 소녀가 알아준 것만 같아서. 너는 기껏 정성스럽게 땋았던 곱슬머리를 다시 풀고, 머리카락을 네 가닥으로 나누어 다시 엮으며, 부동의 마음을 증명한다.
너와 소녀 사이에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는다. 네가 어설픈 손장난을 겨우 마무리 지을 때야 소녀가 팔을 든다. 낡고 해진 드레스 너머 움직이는 견갑골이 보인다. 모든 색을 거부하는 눈부신 흰색이다. 때가 타지 않았더라면, 소녀의 뼈에 걸린 드레스도 같은 색이었을 테다. 그러나 소녀의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탕에서 한바탕 굴렀다가 방치한 것과 같은 얼룩이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보여?
소녀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웃는다. 그제야 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왜 앉은 소녀의 뒤에 서 있는지 곱씹어 볼 겨를이 생기지만, 소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느라 생각은 의문이 되지 못한다. 너는 닳은 관절에 매달린 끝마디뼈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한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
오래 살라는 말이 덕담일 때가 있었다고 한다.
얀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얀이 여태껏 들어본 안부 인사라곤 ‘늙기 전에 죽기를 바란다’ 따위의 행복을 빌어주는 무난한 말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일 건네는 인사와는 반대로, 모두가 하루 한 끼 조촐하게라도 때우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갔다.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희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얀은 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해 계속 사는 셈인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회의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얀은 매순간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생각했는데, 정작 지금의 자신이 뭘 놓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또! 또 떨어졌어! 씨이발, 잘해보라고, 개새끼들아!”
그런 얀이었지만, 도박은 죽을 만큼 경멸했다.
“이 개자식들이 또 내 돈을 없애버렸어! 내 믿음! 신뢰! 전부 쓰레기가 돼버렸다고! 이래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신생 영주한테 투자하지 말고 다들 하는 것처럼 기둥 영주들한테나 투자해. 오래된 재벌한테 돈 쓰는 게 제일 안정적이라고.”
“도전 정신 몰라? 도전 정신! 겁쟁이 새끼, 네가 그러니까 평생 이 엿 같은 구덩이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얀의 친부 야스코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도박을 했다. 그는 판돈을 잃을 조짐이 보일 때마다 얀을 부르곤 했다. 너는 왜 아비가 무시당하는데 가만히 있냐는 말과 함께 발길질이 날아오면, 얀은 몸을 잔뜩 웅크렸다. 야스코는 기분이 나쁘면 아무튼 얀을 일으켜 괴롭혔다. 상처 입은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있으면 봐주는 경우가 있었다. 오늘은 얀의 전략이 통했다. 어김없이 얀을 부르며 이불을 들추던 야스코는 처량하게 몸을 구긴 안을 보더니 쯧, 하고 혀만 한 번 차며 종일 늘어져 있던 낡은 1인용 소파로 돌아갔다.
사실 이 동네 사람들은,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전부가 도박꾼이었다. 그들은 미약하게라도 통신이 터지면 바로 품 안에 고이고이 보관하던 구식 소형 단말기를 꺼내 구간별 전쟁 실황과 트레이딩 차트를 확인했다. 우주를 건 도박의 승패를 가르는 기준은 간단했다. 영주, 초재벌 나으리들의 땅따먹기가 이번엔 성공할 것인가, 아닌가.
우주 도박의 시작을 알려면 조금 앞으로 거슬러야 한다. 역사적인 그날, 개척단은 지구의 귀한 자원과 함께 인류의 무궁한 미래를 기약하며 우주 구석구석에 있는 불모지 행성으로 떠났다. 개척단의 목적은 영광스러운 인류의 테라포밍이었다. 그리고 150년이 조금 안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2131년, 지구는 테라포밍에 성공한 개척단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우호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구와는 이 이상 교류하지 않겠다.’ 개척단은 단호히 선언했다. 이유는 지구의 신분제였다. 개척단은 초재벌을 중심으로 편성된 계급이 국제 기준으로 자리 잡은 지구 사회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재산의 규모에 따라 정해지는 신분의 틀을 거부한 개척단은 지구의 연락을 끊었다. 외지구에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든 그들은 지구의 연락을 지속적으로 무시했다.
‘영주’라는 계급으로 뭉친 재벌과 기업가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동산이 될 행성을 훔친 외지구인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찾았다. 영주는 테라포밍 연구에 거액을 투자한 선대의 업적을 강조하며, 개척단으로 선택받지 못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그들을 건방지고 은혜도 모른다면서 헐뜯었다. 인류가 무얼 위해 같은 인간을 우주로 방출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외지구인이 이기적인 도둑으로 몰려 지구 공공의 적이 되기는 쉬웠다.
하지만 영주는 외지구인을 악마화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았다. 영주는 지구 밖의 우주 자원과, 자원을 문명과 융합한 외지구 신기술을 원했다. 가득 찬 창고를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 저것들이 마땅히 자신들의 몫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그 명분을 앞세워 외지구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아무리 명분이 있어도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개념은 지구 인류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이 점을 우려한 영주는 외지구인과의 무력충돌을 하나의 게임처럼 보이도록 변모시켰다.
게임 세계처럼 아주 간단한 형태로 도식화된 3차원 우주 맵 위엔 외지구인 행성과 영주 세력을 대표하는 아이콘들이 떠 있다. 지구 인류는 단말기로 접속해 맵에서 마음에 드는 영주를 골라 지원할 수 있다. 투자의 이유는 다양했다. 자신의 거주지를 소유하고 있는 영주라서, 영주의 상징 아이콘이 독특해서, 아니면 영주의 딸이나 아들의 생김새가 자신의 취향이라서. 어떤 인간이든, 한 끼 먹을 밥도 안 되는 10코스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
게임으로 변모시킨 전쟁이 불러온 효과는 놀라웠다. 유행에 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구인이라면 응당 영주를 응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세가 됐다.
모든 도박이 그렇듯 판은 투자자가 불리하도록 짜여 있었다. 승패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의 절대적인 양이 적은 데다가, 판돈을 끌어들이기 위한 가짜 뉴스가 판을 쳤다. 누구도 그런 지라시들을 견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응원하는 영주를 좋게 말하는 글만 골라 읽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돈을 걸어놓은 영주의 진영이 한 번이라도 승리하기만 하면 투자액을 조금은 회수할 수 있다. 승리의 규모는 중요치 않다. 투자자들은 그런 상상을 통해 만족을 얻었다. 그게 중요했다. 실제 현금으로 환전받을 수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가상의 화폐가 움직인다는 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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