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이데올로기와 파괴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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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가 위험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1990년대에 로마 가톨릭교회 가정평의회가 '젠더'는 가족과 성서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하면서부터 등장했다. 바티칸 가정평의회의 문서들에서 그러한 개념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데,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바티칸의 정치적 위세를 타고, 그리고 바티칸이 최근 라틴아메리카의 복음주의교회와 맺은 동맹에 힘입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대의 정치 담론에서 ‘젠더’가 지닌 힘을 강조하는 현상으로서, 바티칸의 입장은 세계 정치의 지형에서 젠더의 판타즘적 위력을 강화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일부 기독교인에게 자연의 법칙은 곧 신의 뜻이다. 즉 신이 이원적 성별을 만들었으므로, 그 조건에서 벗어나도록 성별을 재창조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일부 페미니스트 종교학자들은 바로 이 주제에 대해서도 성서에 상반된 견해가 오랫동안 있어왔다고 주장하면서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 점에 개의치 않고 이 오래된 과학[신학]은 성별의 차이가 자연의 법칙으로 정립되었다는 명제를 고수한다. 즉 그런 법칙의 내용이 자연에 의해 확립되었으므로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다는 추정하는 것이다. 자연을 신의 창조물이라고 이해한다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곧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신념은 다음과 귀결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지를 가졌거나 고의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신을 거스르고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셈이며, 아울러 신의 의지를 빼앗겠다고 위협하는 셈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젠더에 반대하는 보수 가톨릭 진영의 논점 중 일부에 불과하다. 2004년, 당시 가톨릭교회의 신앙교리성 장관이던 요제프 라칭거가 그리스도인의 가장 내 역할이 생물학적 성별에서 파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명제에 도전하는 젠더 이론가들 때문에 가정이 위험에 빠지고 있다는 경고를 내놓으면서 현시대의 격론이 구체화되었다. 바티칸에 따르면 노동의 성적 분업은 성별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남성은 유급 고용과 공적 역할로 활약해야 한다. 기독교적이며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온전함이 지평선에 어른거리는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망령으로 인해 위태로워졌다고 한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처음으로 우려를 표명했고, 2004년에는 교황청 가정평의회 의장 자격으로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젠더’가 교회에서 중요한 여성적 가치 및 남녀의 자연적 구분을 파괴할 잠재력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즉위한 이후 2012년에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신이 정해놓은 남자와 여자의 이원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가족”이 “창조에 의해 확립된 실재”임을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으므로, 자신을 창조하려는 사람들은 천지를 창조한 신의 권능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스스로를 창조하는 신성한 능력이 있다고 억단하며 무신론적 신념체계에 오도誤導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따금 진보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했으나 베네딕토 교황이 밟았던 노선을 이어받아 “우리는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절멸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더욱 크게 경종을 울렸다. 그는 이러한 [인간] 훼손의 사례로 특히 “‘젠더’라는 이데올로기”를 꼽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현실에 분노했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학교에서 어린이들이―다름 아닌 어린이들이!―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배웁니다. … 이것은 끔찍합니다!” 이어서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정책을 긍정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신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신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창조하셨는데 … 우리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젠더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은 신의 창조적 권능을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젠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신이 창조한 세계를 겨냥하는 핵무기를 지지하거나 배치하는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이 비유가 시사하는 바는, 젠더는 그 자체가 무엇이든 간에 젠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파괴력, 즉 헤아릴 수 없는 공포를 유발하는 파괴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젠더는 신의 창조 능력에 맞붙어 싸우는, 악마가 휘두르는 절멸의 힘으로 그려진다.
젠더를 지극히 위험한 것으로 묘사하려 애쓰는 가운데 수많은 은유가 뒤죽박죽으로 확산한다. 파괴에 대한 다양한 비유들이 일관된 하나의 그림으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관성이나 모순과 무관하게 축적된다. 그리고 ‘젠더’가 그처럼 다양한 두려움과 불안을 더 많이 끌어모을수록 판타즘은 더욱 강력해진다. 파괴의 한 가지 비유가 듣는 사람 모두에게 통하지 않더라도 다른 비유가 통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비유들이 전부 충분한 속도와 강도로 하나의 이름 아래 쌓인다면 갈수록 다양한 청자들을 사로잡으면서 더욱 널리 퍼질 수 있다. 그들은 파멸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함께 밝혀내고자 하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희생양이 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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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에 대한 개방적 접근으로 찬사를 받긴 했지만, 2020년에 그가 옹호한 것은 게이·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게이·레즈비언 시민결합civil union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015년에 이탈리아어로 처음 출간된 『사람을 죽이는 경제This Economy Kills』라는 책은 교황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는데, 여기서 교황은 젠더 이론이 ‘상보성complementarity,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자와 여자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남녀의 성적 결합이 인간답고 자연스러운 유일한 형태의 성적 결합이라는 견해’의 교리를 부정한다는 사실은 모든 역사적 시기에 ‘헤롯’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비유하며, 방금 언급한 헤롯이나 다름없는 이 젠더 이론가들이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훼손하는 죽음의 음모를 꾸밉니다”라고 말한다. 핵무기의 비유는 ‘젠더 이론’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절멸의 힘을 강조한다. “핵무기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아주 많은 인간을 순식간에 절멸시킬 가능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 신이 창조한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유전자 조작, 생명 조작, 또는 젠더 이론에 대해서도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중에게 젠더 이론가들과 “지난 세기의 독재자들”이 유비관계에 있음을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히틀러 유겐트를 생각해보세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젠더 이데올로기’를 핵전쟁과 나치즘에 비유함으로써 LGBTQIA+ 운동과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파괴의 세력에 맞서 정의로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자극했다. 물론 모든 가톨릭 신자나 가톨릭 단체가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으며, 디그니티USA를 비롯한 일부 단체들은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젠더와 성적 지향을 주장할 권리, 인터섹스인 사람들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확고한 노선을 훌륭하게 견지해왔다. 공포를 조장하는 교황의 수사법이 초래한 결과는 바티칸측, 특히 교황청 가정평의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시카고대학교의 법학 교수 메리 앤 케이스는 이러한 개입들을 기록하고 증명한다. 가령 2011년에 로마교황청은 ‘젠더’에 관한 항목들이 포함된 프랑스 고등학교 교과서들을 회수하기 위해 니콜라 사르코지와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교황청은 젠더에 “인권 제도의 근간 자체”를 훼손할 힘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인간 개념 자체가 위험에 처했다는 뜻인데, 인간이 남녀 양성의 상보성으로, 즉 인간 형태의 둘로써 하나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젠더 이데올로기’가 인간 개념을 파괴할 힘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2013년 프랑스에서 동성 결혼을 위한 법적 투쟁이 성공하자 1년 후 백래시가 뒤따랐고, 여기서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성직자인 토니 아나트렐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교과과정 ‘평등의 ABCDABCD de l’égalité’는 학생들에게 생물학적 성별과 문화적 젠더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방식을 제시했다. 그런데 아나트렐라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젠더 이론’을 교육받고 있으며 이것이 아이들의 성적 지향에 혼란을 초래하고 성적 발달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경고한 이후에 이 과정이 폐지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교과과정의 철회 시도를 조직한 사람 중 한 명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에 일부 프랑스 사람들은 국가의 고유 권한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공교육 정책에 교회가 간섭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실제로 이 교과과정은 철회되었다. 그리고 바티칸은 철회된 이 교과과정에 필적하는 견해를 제시하기 위해 젠더에 관한 자체 제작 교과서를 펴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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