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녕 장편소설
![]()
01. 1998
민경은 와인을 따라 놓고도 오래도록 마시지 못했다. 와인 향이 물안개처럼 테이블 위를 뒤덮는 동안 그녀는 오직 자신의 검은 눈동자만을 움직일 뿐이었다. 눈만 살아 있는 목각 인형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붉은 와인을 거쳐 흰 접시 위 정갈하게 담겨 있는 반찬들에 잠시 머물렀다. 곰취부터 시작해 호박잎, 취나물, 고사리까지. 모두 미국에서도 자라는 것들이었지만 한국에서 난 것에 비해 워낙 억세서 먹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민경은 부엌 한 켠에 놓여 있는 박스들을 다시 보았다. 박스 상단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정신 차려.”
한이 혼잣말을 하며 자기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지그시 눌렀다.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는 포식자가 숨어 있는 수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같았다. 한의 목소리는 기타 리프에 미묘하게 어긋난 박자로 들렸다. 와인 냉장고 앞에 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와인들을 훑었다.
와인을 꺼내 드는 한의 몸짓에서는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은 능숙하게 오프너로 와인을 열고 민경의 잔에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한이 따른 와인이 소용돌이치며 이미 민경의 잔을 채우고 있던 와인과 한데 뒤섞였다. 서로 다른 피가 섞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마셔 봐.”
한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민경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두 와인병을 번갈아 보았다. 병에 똑같은 라벨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지역, 같은 회사에서 만든 와인인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둘의 생산 연도만이 달랐다. 각각 1982년산, 1979년산 와인이었다. 라벨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들고 있는 목사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민경은 MTV에서 본 악마 분장을 한 밴드들을 떠올리며 팝 록이 유행인 요즘 시대에 어울리는 라벨이라 생각했다. 한이 보채듯이 물었다.
“어때?”
민경이 조심스럽게 잔을 들고 소리 내어 한 모금 마셨다. 한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민경의 반응을 살폈다. 민경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그러자 한은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랍을 열고, 찬장을 뒤적거렸다. 민경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제 먹으면 안 돼?”
민경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한은 민경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챙겨 왔다. 비커와 스포이트였다. 민경은 대답 없는 한의 반응에 다시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다시 한번 물었다.
“그건 왜?”
한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여러 병 꺼내 비커에 따르고는 스포이트를 반복해서 씻어냈다.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한은 민경의 와인 잔에다 스포이트를 가져다 대고는 물을 한 방울씩 아주 천천히 떨어뜨렸다.
“겉보기엔 큰 변화 없어 보이겠지. 색도 없는 데다, 냄새도 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나가 전부를 바꿔.”
물에 와인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그것이 물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와인이 침입하여 정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그 반대는 와인이 피라냐 떼처럼 물방울을 뜯어 삼키는 듯했다. 한은 민경에게 와인 잔을 건넸다.
“자. 이렇게 마셔 봐. 젓지 말고.”
민경은 조심스럽게 와인 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다 댔다. 전과는 다르게 풍미가 배로 살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민경은 와인을 연달아 삼키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한에게 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안 거야?”
“고향에서 배웠지.”
민경은 한이 고향에 대해 말할 때 짓는 표정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추억에 빠진 것도 아닌, 트라우마를 헤매는 것도 아닌.
민경은 한에게 고향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는 ‘지천에 광대버섯들이 가득한 것만이 장점인 시골’이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으니까. 그녀는 한의 고향에 대해 여행객처럼 아주 작은 양의 정보만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미국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스티븐 킹 소설에 나올 법한, 말 그대로 시골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곳이고 관광 상품이라고는 드넓은 옥수수밭과 더불어 야산에 가까운 벌판이 전부인데, 올드카의 녹슨 글러브 박스에 발견될 법한 낡은 여행 책자 한 귀퉁이에 ‘남북 전쟁 당시 남부군 소속의 한 장군이 열한 명으로 북부군 스물셋을 몰아낸 전투가 벌어진 장소’라고 적힌 것이 그 마을에 관한 옛 기록의 전부였다. 한이 말했다.
“얼른 먹어. 다 식었겠다.”
민경은 그제야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이 물었다.
“직접 한 건데, 어때? 한국 사람들도 좋아할까?”
민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음식들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러나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혀가 뻣뻣하게 굳어 가는 듯했다. 민경은 마치 한의 집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하얀 대리석과 새까만 천장 사이에 놓여 있는 아일랜드 식탁을 비롯해 수도꼭지 하나까지도 자로 재단한 듯 곡선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한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수저도 민경이 들고 있는 한 쌍뿐이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목이 막혀 왔다. 민경은 조심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넌 안 먹어?”
“괜찮아. 너 많이 먹어.”
민경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미소를 짓자, 한은 민경의 잔에 와인을 더 따르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봉투였다. 민경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는 서류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부동산 관련 서류였는데, 익숙한 주소와 이름이 한글로 적혀 있었다. 민경이 한에게 물었다.
“이거 우리 부모님 한국 집 주소잖아.”
민경은 다시 한번 서류를 살폈다. 소유자 이름에 ‘앤드루 박 주니어’라 적혀 있었다.
“그런데 소유자가 왜 너야?”
“내가 샀어.”
민경은 놀라 되물었다.
“뭐?”
“그때 부모님 집 경매로 넘어갈 것 같다고 걱정했잖아.”
민경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은 민경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가지겠다는 게 아니니까.”
“그럼…….”
한은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우리 결혼식만 끝나면 다시 아버님께 돌려드릴 거야.”
“그게 아니라…….”
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민경에게 다가갔다. 그가 민경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건 전부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까.”
달콤한 말들이 둘 사이를 오갔고, 자연스럽게 그들은 침실로 가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가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까만 천장에 비치는 둘의 얼굴에서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민경은 한의 등 중앙에 위치한 흉터를 어루만지며 느껴지는 불안 때문에 한에게 집중할 수 없었고, 한은 천장을 향해 눈을 치켜뜨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허옇게 얼굴이 질린 것이 과거 고향의 호수 한가운데서 떠오른 시체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민경은 그런 한의 모습을 보고는 꼭 기도를 올리는 순교자 같다고 생각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