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기반을 먹어치우며 작동하는 자본주의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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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본주의
예기
요즘 자본주의 비판이 일종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어요. 독일식으로 말하면, ‘제철을 만났다’고나 할까요.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정치적·지적 논쟁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신세였죠. 심지어는 선생님과 제가 속한 전통인 ‘비판 이론’의 주제 목록에서마저 사라졌어요. 하지만 이제는 자본주의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시장경제, 지구화, 현대사회 혹은 분배, 정의에 관한 관심만이 아닌 자본주의 자체에 관한 관심 말이에요. 그리고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2007~2008년 금융위기는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다들 알고 있듯이, 이 위기는 금융 영역에서 재정 영역, 경제 영역으로, 그리고 다시 정치와 사회로 눈사태처럼 급속히 커졌어요. 정부, 유럽 연합, 복지국가 제도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회통합을 이루는 뼈대까지 흔들어놓았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를 겪고 난 후, 서구 국가 시민들은 경제·사회질서의 불안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노출된 적이 없었어요. 이런 벌거벗은 느낌은 겉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정부가 보여준 대응에 의해 더욱 확대되고 덧나기만 했죠. 이런 정부의 대응은 말 그대로 무기력하기만 한 상태, 아니면 차가운 무관심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렀거든요.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주의 비판이 아주 빠른 속도로 다시금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에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학계에서든 토론장에서든 ‘자본주의’라는 말은 형편없이 취급받았죠. 확실히 우리가 경험한 자본주의 비판 가운데 일부는 산만하거나 단순 무식했고 심지어는 뻥튀기에 가깝기도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과 저는 오늘날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롭게 재구성된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생님이나 저 같은 비판 이론가에게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죠. 그러니 다시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요.
프레이저
정말 그래요. 자본주의를 향한 관심이 돌아온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좋은 소식이고, 저나 예기 선생에게도 그렇죠. 우리 둘 다 이 주제를 둘러싼 관심에 다시 불을 붙이려 독자적으로 작업해왔잖아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우리는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비판에서 뽑아낸 핵심 사상을 비판 이론에 재도입하려고 노력했어요. 예기 선생의 경우에는 ‘소외’ 개념을, 제 경우에는 ‘위기’와 ‘모순’ 개념을 다시 끌어들이려 했죠. 또한 우리 둘 다 자본주의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려 시도했어요. 예기 선생의 경우에 자본주의란 ‘삶의 형태a form of life’였고, 제 경우에는 ‘제도화된 사회질서an institutionalized social order’였죠. 하지만 최근까지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였어요. 이제는 바뀌었죠. 지금은 저나 예기 선생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해요. 자본주의가 (다시금) 문제이며 정치적·지적 주목을 받을 만한 대상이라는 광범위한 합의가 있어요. 예기 선생이 말한 대로,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리가 매우 심각한 위기, 즉 무시무시한 시스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고,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최근의 공감대는 이런 생각을 반영하고 있어요. 달리 말해 우리는 단순히 서로 분리돼 있는 주기적 문제의 조합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삶의 형태에서 가장 중심에 단단히 자리한 심층 구조의 기능 장애와 마주하고 있죠.
비록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이 말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이에요. 저는 이런 현상이 주요 시스템 위기의 심층 구조적 근원을 밝혀주는 비판 이론을 갈구한다는 신호라고 읽어요. 의미심장한 일이죠. 그런데도 사실 많은 경우에 ‘자본주의’라는 말은 주로 수사로만 쓰이고, 실질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런 개념이 필요하다는 제스처 정도로만 작동하죠. 이 시대를 사는 비판 이론가인 우리는 명확하게 질문을 제기해야 해요. 오늘날 자본주의를 말할 때 그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를 가장 훌륭하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변화 이전의 상황
예기
자본주의가 복귀하고 있다는 관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해야겠어요. 물론 사회 정의나 경제 정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운동이나 운동 단체는 항상 존재했죠. ‘분배 정의’라는 주제가 학계에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고요. 또한 발전도상국에서 민족 자립, 불평등, 빈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해서나 지구화에 관해 토론할 때마다 경제 문제가 부각되기도 했어요. 그리고 일부 학문 동아리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근대성’의 동의어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 ‘자본주의 비판’은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와 들뢰즈G. Deleuze의 맥락에서 문화 비평을 논하는 것으로 일단락되곤 하죠. 그러나 이런 접근법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파악하지는 않아요. 전제조건, 역학, 위기 경향, 근본적 모순과 갈등 따위의 매우 구체적인 조합을 수반하면서 생산양식에 토대를 둔마르크스라면 이렇게 했겠죠 삶의 포괄적 형태라고 바라보지는 않아요.
프레이저
네, 맞아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 자본주의에 쏟아지는 관심은 예기 선생이 방금 언급한 사례들과 같은 제한되고 부수적인 접근법을 넘어서죠. 제가 말했듯이, 뿌리 깊은 위기가 곳곳에 만연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이런 관심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어요. 단지 한 부문만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 질서의 모든 주요 측면을 포괄하는 위기라는 거죠. 이 점에서 단지 ‘경제적’ 문제만은 아니에요. 불평등이나 실업, 분배 악화‘만’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이 문제도 심각합니다. 심지어 1% 대 99%라고 할 수도 없어요. 이런 수사 덕분에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에 관해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더라도 말이에요. 아니, 문제는 훨씬 더 심층적이에요. 부가 어떻게 ‘분배’되는가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일단 무엇을 부로 간주하는가, 그리고 부를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종류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얼마나 얻는가 하는 문제 이면에는 무엇을 노동으로 간주하는가,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는가, 이런 노동의 조직화가 현재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죠.
제 생각에는 앞으로 자본주의에 관해 토론하면서 이런 물음을 중심에 놓고 따져봐야 해요. 왜 어떤 이는 더 많이 갖고 어떤 이는 덜 갖는지만이 아니라, 왜 오늘날 이토록 적은 수의 사람만이 안정적 삶을 누리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왜 이토록 많은 수의 사람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차지하고 아웅다웅하고 N잡을 뛰는 곡예를 부리면서도 권리, 보호, 혜택은 줄어들기만 하고 무거운 빚을 지는 신세가 되는지 따져봐야 해요.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가족생활에서 더욱 극심해지는 스트레스를 둘러싸고 또 다른 근본적 문제가 있어요. 왜, 그리고 어떻게 유급 노동과 부채의 압박이 자녀 양육, 노인 돌봄, 가사노동 분담, 공동체 유대 등의 조건, 간단히 말해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 전반을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죠.강조는 웹진 나비 편집자 자원을 착취할 대상으로서만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점점 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둘러싸고도 역시 심각한 물음이 제기돼요. 자본주의는 자연을 에너지와 원료를 뽑아낼 ‘수도꼭지’로 보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처리해줄 ‘하수구’로도 여기거든요. 마지막으로, 정치적 문제도 잊어서는 안 돼요. 이를테면 시장의 힘은 두 가지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죠. 한편으로는 영토국가 수준에서 정당과 공공기관을 대기업의 수중으로 넘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국적 수준에서 글로벌 금융, 그러니까 어떤 유권자 집단demos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세력이 정치적 의사결정 권한을 탈취하죠.
이 모두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중심에 둬야 할 점이에요. 이것이 함의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겪는 위기가 단지 경제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죠. 위기에는 돌봄 결핍, 기후변화, 민주화의 역행도 포함돼요. 하지만 이런 정식화만으로는 부족해요. 더 심층에 자리한 쟁점은 꼬이고 꼬인 모든 난제의 토대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런 난제가 동시에 출현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며, 사회질서에서 아주 근본적으로 무엇인가가 부패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생각이 커지고 있어요. 바로 이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 다시 자본주의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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