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7

자기 기반을 먹어치우며 작동하는 자본주의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저자소개

저자 · 라엘 예기
1966년 스위스 태생의 철학자로, 베를린 자유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수학했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정치·사회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제자로, 비판 이론 제4세대의 촉망받는 학자다. 저서로 『소외(Entfremdung)』, 『삶의 형태 비판(Kritik von Lebens-formen)』, 『진보와 퇴보(Fortschritt und Regression)』 등이 있다.
저자 · 낸시 프레이저
미국의 정치철학자, 사회이론가. 뉴욕 뉴스쿨의 철학․정치사회이론 담당 교수로 있다. 독일 비판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프레이저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계급과 젠더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펼쳤다.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신자유주의가 확고한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은 1990년대에 착수한 ‘정의’론 작업이었다. 그는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는 존 롤스식 정의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197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여성운동, 흑인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이 제기하는 또 다른 정의관, 즉 문화적 정체성의 ‘인정’을 중심에 둔 정의관을 적극 수용해 이 둘의 공존과 상호작용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의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정의론은 악셀 호네트와 벌인 논쟁의 기록 《분배냐, 인정이냐?》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프레이저의 정치사회이론은 부단히 진화했다. 그는 정의의 또 다른 축으로서, 분배와 인정의 측면에서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 ‘대표’의 측면에서 만인의 동등한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삼차원적 정의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지구화 시대에 정치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공론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그의 이러한 정의론 작업을 결산한 저작이다. 경제 위기와 극우 포퓰리즘의 창궐, 기후 급변 등으로 어지러웠던 2010년대에 프레이저는 이제까지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다른 어떤 사회이론가보다 더 맹렬히 현실에 개입하면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그는 정체성 정치만 강조하며 분배 요구를 등한시한 사회운동들을 비판했고, 최근 극우 포퓰리즘이 상당수 대중에게 대안으로 선택받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특히 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식의 낡은 틀에 갇혀 있는 여성운동을 향해 자기 성찰과 노선 전환을 촉구했다. 그 결실이 《전진하는 페미니즘》 《99% 페미니즘 선언》(공저) 같은 저작들이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사회운동과 좌파정치 전반이 환골탈태해야 함을 역설했다. 2020년 미국 대선 직전에 펴낸 팸플릿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에서 그는,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극우 포퓰리즘이 발호하도록 만든 원흉이기에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즉, 극우 포퓰리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동맹에 바탕을 둔 ‘진보적 포퓰리즘’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운동, 흑인운동 등이 굳건한 동맹을 발전시켜야 할 근거를 ‘자본주의’라는 토대 자체에서 찾아내려 한다. 다만, 이 ‘자본주의’는 더 이상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던 그 ‘자본주의’와 같지 않다. 자본-임금노동 관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더 복잡한 제도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드디어 프레이저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은 그 전모를 드러낸다.
역자 · 장석준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진보정당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 왔다. 진보신당 부대표를 지냈고 2018년 현재는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이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2014), 《사회주의》(2013), 《장석준의 적록서재》(2013), 《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2011)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도서관과 작업장: 스웨덴,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2017), 《극단적 중도파: 세계 정치에 내린 경계경보》(2017), 《국가 대 시장: 지구경제의 출현》(2015),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이전》(공역, 2001) 등이 있다.

다시, 자본주의


예기

요즘 자본주의 비판이 일종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어요. 독일식으로 말하면, ‘제철을 만났다’고나 할까요.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정치적·지적 논쟁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신세였죠. 심지어는 선생님과 제가 속한 전통인 ‘비판 이론’의 주제 목록에서마저 사라졌어요. 하지만 이제는 자본주의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시장경제, 지구화, 현대사회 혹은 분배, 정의에 관한 관심만이 아닌 자본주의 자체에 관한 관심 말이에요. 그리고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2007~2008년 금융위기는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다들 알고 있듯이, 이 위기는 금융 영역에서 재정 영역, 경제 영역으로, 그리고 다시 정치와 사회로 눈사태처럼 급속히 커졌어요. 정부, 유럽 연합, 복지국가 제도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회통합을 이루는 뼈대까지 흔들어놓았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를 겪고 난 후, 서구 국가 시민들은 경제·사회질서의 불안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노출된 적이 없었어요. 이런 벌거벗은 느낌은 겉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정부가 보여준 대응에 의해 더욱 확대되고 덧나기만 했죠. 이런 정부의 대응은 말 그대로 무기력하기만 한 상태, 아니면 차가운 무관심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렀거든요.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주의 비판이 아주 빠른 속도로 다시금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에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학계에서든 토론장에서든 ‘자본주의’라는 말은 형편없이 취급받았죠. 확실히 우리가 경험한 자본주의 비판 가운데 일부는 산만하거나 단순 무식했고 심지어는 뻥튀기에 가깝기도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과 저는 오늘날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롭게 재구성된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생님이나 저 같은 비판 이론가에게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죠. 그러니 다시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요.


프레이저 

정말 그래요. 자본주의를 향한 관심이 돌아온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좋은 소식이고, 저나 예기 선생에게도 그렇죠. 우리 둘 다 이 주제를 둘러싼 관심에 다시 불을 붙이려 독자적으로 작업해왔잖아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우리는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비판에서 뽑아낸 핵심 사상을 비판 이론에 재도입하려고 노력했어요. 예기 선생의 경우에는 ‘소외’ 개념을, 제 경우에는 ‘위기’와 ‘모순’ 개념을 다시 끌어들이려 했죠. 또한 우리 둘 다 자본주의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려 시도했어요. 예기 선생의 경우에 자본주의란 ‘삶의 형태a form of life’였고, 제 경우에는 ‘제도화된 사회질서an institutionalized social order’였죠. 하지만 최근까지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였어요. 이제는 바뀌었죠. 지금은 저나 예기 선생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해요. 자본주의가 (다시금) 문제이며 정치적·지적 주목을 받을 만한 대상이라는 광범위한 합의가 있어요. 예기 선생이 말한 대로,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리가 매우 심각한 위기, 즉 무시무시한 시스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고,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최근의 공감대는 이런 생각을 반영하고 있어요. 달리 말해 우리는 단순히 서로 분리돼 있는 주기적 문제의 조합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삶의 형태에서 가장 중심에 단단히 자리한 심층 구조의 기능 장애와 마주하고 있죠.


비록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이 말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이에요. 저는 이런 현상이 주요 시스템 위기의 심층 구조적 근원을 밝혀주는 비판 이론을 갈구한다는 신호라고 읽어요. 의미심장한 일이죠. 그런데도 사실 많은 경우에 ‘자본주의’라는 말은 주로 수사로만 쓰이고, 실질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런 개념이 필요하다는 제스처 정도로만 작동하죠. 이 시대를 사는 비판 이론가인 우리는 명확하게 질문을 제기해야 해요. 오늘날 자본주의를 말할 때 그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를 가장 훌륭하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변화 이전의 상황


예기 

자본주의가 복귀하고 있다는 관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해야겠어요. 물론 사회 정의나 경제 정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운동이나 운동 단체는 항상 존재했죠. ‘분배 정의’라는 주제가 학계에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고요. 또한 발전도상국에서 민족 자립, 불평등, 빈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해서나 지구화에 관해 토론할 때마다 경제 문제가 부각되기도 했어요. 그리고 일부 학문 동아리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근대성’의 동의어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 ‘자본주의 비판’은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와 들뢰즈G. Deleuze의 맥락에서 문화 비평을 논하는 것으로 일단락되곤 하죠. 그러나 이런 접근법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파악하지는 않아요. 전제조건, 역학, 위기 경향, 근본적 모순과 갈등 따위의 매우 구체적인 조합을 수반하면서 생산양식에 토대를 둔마르크스라면 이렇게 했겠죠 삶의 포괄적 형태라고 바라보지는 않아요.


프레이저 

네, 맞아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 자본주의에 쏟아지는 관심은 예기 선생이 방금 언급한 사례들과 같은 제한되고 부수적인 접근법을 넘어서죠. 제가 말했듯이, 뿌리 깊은 위기가 곳곳에 만연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이런 관심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어요. 단지 한 부문만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 질서의 모든 주요 측면을 포괄하는 위기라는 거죠. 이 점에서 단지 ‘경제적’ 문제만은 아니에요. 불평등이나 실업, 분배 악화‘만’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이 문제도 심각합니다. 심지어 1% 대 99%라고 할 수도 없어요. 이런 수사 덕분에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에 관해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더라도 말이에요. 아니, 문제는 훨씬 더 심층적이에요. 부가 어떻게 ‘분배’되는가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일단 무엇을 부로 간주하는가, 그리고 부를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종류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얼마나 얻는가 하는 문제 이면에는 무엇을 노동으로 간주하는가,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는가, 이런 노동의 조직화가 현재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죠.


제 생각에는 앞으로 자본주의에 관해 토론하면서 이런 물음을 중심에 놓고 따져봐야 해요. 왜 어떤 이는 더 많이 갖고 어떤 이는 덜 갖는지만이 아니라, 왜 오늘날 이토록 적은 수의 사람만이 안정적 삶을 누리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왜 이토록 많은 수의 사람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차지하고 아웅다웅하고 N잡을 뛰는 곡예를 부리면서도 권리, 보호, 혜택은 줄어들기만 하고 무거운 빚을 지는 신세가 되는지 따져봐야 해요.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가족생활에서 더욱 극심해지는 스트레스를 둘러싸고 또 다른 근본적 문제가 있어요. 왜, 그리고 어떻게 유급 노동과 부채의 압박이 자녀 양육, 노인 돌봄, 가사노동 분담, 공동체 유대 등의 조건, 간단히 말해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 전반을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죠.강조는 웹진 나비 편집자 자원을 착취할 대상으로서만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점점 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둘러싸고도 역시 심각한 물음이 제기돼요. 자본주의는 자연을 에너지와 원료를 뽑아낼 ‘수도꼭지’로 보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처리해줄 ‘하수구’로도 여기거든요. 마지막으로, 정치적 문제도 잊어서는 안 돼요. 이를테면 시장의 힘은 두 가지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죠. 한편으로는 영토국가 수준에서 정당과 공공기관을 대기업의 수중으로 넘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국적 수준에서 글로벌 금융, 그러니까 어떤 유권자 집단demos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세력이 정치적 의사결정 권한을 탈취하죠.


이 모두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중심에 둬야 할 점이에요. 이것이 함의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겪는 위기가 단지 경제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죠. 위기에는 돌봄 결핍, 기후변화, 민주화의 역행도 포함돼요. 하지만 이런 정식화만으로는 부족해요. 더 심층에 자리한 쟁점은 꼬이고 꼬인 모든 난제의 토대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런 난제가 동시에 출현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며, 사회질서에서 아주 근본적으로 무엇인가가 부패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생각이 커지고 있어요. 바로 이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 다시 자본주의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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