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3

김초엽 소설집

저자소개

저자 · 김초엽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사이보 그가 되다』(공저) 등을 출간했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도영 언니, 그동안 잘 지냈어요? 사실 언니는 별로 걱정이 안 돼요. 언니는 어떤 상황에서든 늘 씩씩하게 지내잖아요. 그래도 너무 늦게 소식 전해서 정말 미안해요. 메시지 보낼 여력이 안 됐거든요. 제 위치를 숨겨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전 지금 잘 살아 있답니다. 당분간 몸을 좀 사려야겠지만요.


지난번 언니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엄청 미안했어요. 생각해보니 언니 입장에서는 진짜 황당했을 것 같더라고요. 친한 동생이 갑자기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잠적하더니, 몇 달 뒤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데 무슨 일인지는 말도 안 해주고, 가끔 만날 때마다 넋 나간 듯 허허 웃고만 있고. 그러다 애가 실종이 됐는데, 동생인지 사촌인지 모를 이름으로 남긴 메시지의 주소로 가봤더니 방에 시체 조각인지 내장인지 모를 살점과 피부 껍데기, 인체 해부도 따위가 널려 있고, 그런데 여기가 걔가 살던 집이라 그러고…….


아휴, 진짜 제 죗값을 생각하면 아득하네요.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경악한 언니 표정이 떠올라 좀 웃었어요. 그 현장을 보고도 언니는 차라리 제가 사람을 죽였으면 죽였지, 살해당한 건 절대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다면서요? 그럴 줄 알고 일부러 다른 사람이 아닌 도영 언니에게 연락한 거예요. 만약 저희 엄마나 오빠가 그 방 꼴을 먼저 봤으면, 분명 우리 현이 죽인 놈 찾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전국을 들쑤시고 다녔을걸요. 그럼 제일 곤란한 건 죽지도 않은 제가 됐을 거고요.


정말이지, 언니를 일부러 난감하게 하려 한 건 절대 아니었어요. 급하게 짐만 챙겨서 도망쳐야 하는 사정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떠난 다음에야 방에 피부 조각들을 놔두고 온 게 생각난 거 있죠? 그래도 일주일 정도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빨리 부패가 시작되다니. 날씨가 워낙 더워서였나.


청소 업체에서 얼른 인공피부라는 걸 알아채서 다행이에요. 전문가들이야 금방 알아보긴 하지만. 만약 수상한 범죄 현장이라고 경찰에 신고라도 했으면, 언니도 무슨 살인

현장 목격자나 증인 같은 걸로 불려 다녔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제가 언니에게 미안해 고개를 못 들었겠죠. 물론 방을 수습해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요. 돌아가면 꼭 보답할게요.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지냈던 거냐고, 무슨 사고를 친 거냐고 물었죠? 이젠 솔직히 털어놓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일단, 강조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마약은 절대 아니에요.


살인 청부도 아니에요.


어떤 종류의 폭력이나 불건전한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았어요. 절대 그럴 생각도 없었고요. 음, 불건전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하지만…….


저는 그동안 뭐랄까, 좀 이상한 가게에서 일했어요. ‘솜솜 피부관리숍’이라는 곳이었죠. 고작 몇 달이었는데,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요. 결국 불미스러운 사건에 엮이고 말았지만, 절대 나쁜 일을 하는 곳은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말이 되니, 그럼 네 방의 그 징그럽고 냄새나던 살점들은 뭔데! 하고 어이없어할 언니를 위해서, 하나씩 차근차근 이야기해볼게요.


결국 이 모든 소동은 다 그 작은 피부관리숍과 수상한 손님, 수브다니에게서 시작됐거든요.


*


언니가 기겁할까 봐 한 번도 자세히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저는 작년 가을까지 인공장기 배양 회사에서 일했어요. 처음에는 심장 파트에서, 그다음에는 간 파트에서요. 의뢰자들에게 세포와 유전자 샘플을 제공받아 면역반응이 없는 이식용 세포 기반 인공장기를 길러내는 일이었죠.


적성에 꽤 잘 맞았어요. 사실 평소에는 심장이나 간을 꺼내 볼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인지 바이오리액터 안의 장기들은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어요. 영화 속 소품 같다고 해야 하나. 무덤덤하게 배양액 탱크를 갈아 끼우고, 이물질을 제거하고, 아직 손톱만 한 미성숙 심장들이 심겨 있는 플레이트에서 불량품을 핀셋으로 골라냈어요.


문제는 그다음이었는데, 다시 떠올리기 싫은 매니저와의 지긋지긋한 말다툼이 좀 있었고……. 그러고 나서 저는 안구 배양 파트로 옮겨졌어요. 제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죠. 전 물고기 눈알 공포증이 있거든요. 그래도 물고기 눈과 인간 눈은 다르겠지 하고 첫 출근을 했는데,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랬어요.


어두운 조명 아래 금속 라인을 따라 줄지어 선 유리관, 붉은빛의 반투명한 배양액, 그 안에 둥둥 떠 있는 실핏줄 가득한 커다란 눈알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 머리 위에서 우우웅― 하고 신경을 긁는 기계음.


호러영화의 물리적 실현이었죠. 정말 최악이었어요.


악몽을 꿨어요. 천 개의 안구가 데굴데굴 구르며 나를 따라오는 꿈, 눈알들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꿈……. 그렇게 불면에 시달린 지 사흘째, 미성숙 안구가 들어있는 시험관을 깨뜨렸어요. 시험관은 넘어지며 다음 시험관을, 그다음 시험관을 깨뜨렸고 바닥에 자라다 만 안구들이 쏟아져 굴러다녔죠. 저를 원망하는 눈빛이었어요. 그걸 보며 생각했답니다. 와, 빨리 도망쳐야겠다!


그게 제가 뜬금없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온 이유예요. 이 얘기를 어쩌다 해주면 다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심장이나 간은 괜찮은데, 눈알은 무서워?” 하고 묻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말 안 하고 있었죠. 어쨌든.


경력을 인정해주는 회사로 옮기고 싶었는데, 안구를 아예 안 다루는 인공장기 회사는 드물더라고요. 저축한 돈을 하루하루 까먹으며 가족들의 전화를 차단하고 팔자 좋은 백수 생활을 하던 석 달째, 그 공고를 발견했어요.


솜솜 피부관리숍

성수동 버드나무 거리 입구.

재료와 표면, 인간 본질의 상호 관계를 탐구함.

실험적 피부 개선 및 관리 지향.

파트타임 가능. 인공장기 및 오가노이드 배양 경험자 우대.


어딘가 좀 성의가 없지 않나요? 공고만으로는 뭘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 점이 오히려 눈에 들어왔어요. 한번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어졌죠.


만약 언니가 버드나무 거리, 그러니까 바이오해커 거리에 대해 안다면, 분명 움찔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일단은 긴장했어요. 거리 대부분의 가게가 불법과 합법을 아슬아슬 오가는, 단속과 소송의 온상지라 들었었죠. 온갖 생명 윤리와 기술 규제에 대한 토론거리가 쏟아지고, 종교 단체 사람들이 몰려와 통성기도를 하다가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회개하라고 윽박지르는 그런 곳이라고요.


음, 면접을 보러 가봤더니 실제 느낌은 다르더라고요. 상상과 달리 바이오해커 거리는 활기찬 분위기였어요. 공방과 소규모 가게들이 들어선 널찍한 길과 바쁘게 물건을 나르는 기계들, 들뜬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밝은 표정의 사람들, 괴상한 신체 변형을 시도한 사람들이 유독 많다든지, 공원 입구의 핫도그 트럭에서 유전자 개조 셀프 키트를 같이 팔고 있다든지 하는 게 좀 특이했지만 뭐,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고요.


솜솜 피부관리숍은 커스텀 인공피부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고객이 원하는 피부를 설계하고 배양해서 이식 가능한 형태로 제작하는 가게였죠. 사장은 오랫동안 생체 재료를 이용한 시각예술을 하다가 몇 년 전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이곳에 와서, 가게를 차렸다고 했어요.


사장이 수줍게 보여준 자신의 이전 작품들은 주로 인체 기관과 조직으로 만든 기묘한 형태의 조각 위에 끈적끈적한 점액과 오일, 오물을 얹은 것들이었죠. 사장은 원래 단단한 재료로 조각을 하다가 유동적이고 쉽게 뭉개지는 재료로 넘어왔는데, 그랬더니 형상을 조형하는 방식도, 감각하는 방식도, 상상하는 방식도 바뀌었대요. 사장은 이런 생각에 도달했죠. 인간의 재료가 달라진다면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도 바뀌지 않을까? 우리가 매끈한 가죽과 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까끌까끌한 털로 뒤덮인 존재라면, 혹은 석고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잘 부스러지는 존재라면? 인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매끈한 피부는 인간의 본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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