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1

내면의 삶을 기르는 배움에 대하여

저자소개

저자 · 제나 히츠
철학자이자 교육자. 세인트존스 칼리지, 케임브리지대학교, 시카고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고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적용에 관심이 많다. 성공이나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넘어서는 지적 활동의 희열과 자기 성찰의 가치를 주제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공부와 독서가 도구적 목적에 치우치는 현상을 비판하며, 사색과 몰입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을 탐구한다. 맥길대학교, 오번대학교, 메릴랜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현재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고전 교육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는 매우 밀도 있게 인문학적 배움과 교감을 옹호하는 책이다. 그는 내면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던 학계를 떠나 공부와 배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이야기를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자신의 통렬한 지적 탐구를 토대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이란 무얼지 사유해보기를 제안한다. 이 책으로 댈러스 인문학 연구소가 수여하는 하이엇 상(Hiett Prize in the Humanities)을 받았다.
역자 · 박다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했다. 《필 스터츠의 내면강화》 《우리가 결정한 행복》 《이토록 지적인 산책》 《과부하인간》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 《스피닝》 《애도 클럽》 등을 옮겼다.

프롤로그


나는 왜 공부하는 삶을 되찾고 싶었나


삶의 여정 중반에 이르러 나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동부의 외딴 숲속에 자리한 가톨릭 종교 공동체 마돈나 하우스Madonna House에서 지냈다. 우리의 거처 주변을 흐르는 강은 겨울이 오면 판판한 빙판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날씨에 따라 얼고 녹으면서 공중으로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여름에는 따뜻해진 강물에서 수영을 하거나 배를 타고 두터운 수초 사이로 나아가며 야생적이고도 쓸쓸한 계곡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은 소박했고, 바깥세상으로부터 숨겨진 만큼 가난했다. 공동체가 의도적으로 가난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 침실에 모여서 잤고, 물을 아껴 썼으며, 기부받은 옷을 입었다. 채소는 짧은 제철이 지나고 나면 지하 저장실이나 냉동고에 보관해둔 것을 꺼내 먹었다.


나는 내게 배정되는 갖가지 임무를 따랐다. 한번은 제빵사로 일했는데, 종일 변덕스러운 효모와 화덕불을 다루느라 온몸이 반죽과 밀가루와 재로 뒤덮이곤 했다. 그다음엔 수공예실에 들어가 가구를 수리하고, 책을 수선하고, 재료를 정리하고, 명절마다 장식을 했다. 19세기 가정주부 수업을 받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농담을 했었다. 나는 도서관에서도 일했고, 그다음으로는 기증받은 골동품을 공동체가 운영하는 기념품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깨끗이 닦고 조사하는 일을 제법 오래 했다. 청소와 설거지,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채소를 수확하는 일처럼 공동체 모두가 함께하는 노동에도 참여했다. 이런 공동체에서 으레 그러하듯 우리는 맡은 일을 자주 바꾸어서 누군가 하는 일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지 않게끔 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일을 성취의 수단이 아니라 남들을 돕는 활동으로 보기가 한결 쉬웠다. 재능과 관심은 소중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공동체에서 맡은 갖가지 일과 삶을 대한 본질적인 태도는 캐나다로 떠나기 전 20년 동안 나 스스로 준비했던 것과는 단연코 달랐다. 나는 17세부터 38세까지 온전히 고등 교육 기관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는 학생 신분이었고, 졸업 후에는 교수이자 고전철학 학자가 되어 학계에 머물렀다.


내가 걸어온 전문 지식인의 삶은 유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는 이미 온갖 종류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침실 바닥에 책이 몇 무더기 쌓여 있었고, 우리가 살던 19세기 주택의 먼지투성이 벽들도 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빠는 내게 글자 읽는 법을 알려주었고 독서에 대한 갈망을 전염시켰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전문적인 훈련이나 지원은 받지 않았지만 순수하게 책과 언어와 사유를 사랑했다. 단어 본연의 가장 좋은 의미 그대로 아마추어애호가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970년대의 샌프란시스코는 여러 잘 알려진 이유로 인해 특이한 공간이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또렷이 눈에 들어오는 사실은 여가leisure가 훨씬 부족해진 지금과 달리 그 시대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이 여가에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독서를 즐기기 위해 책을 읽었고, 사유하기 위해 사유했으며, 그러기 위해 북부 캘리포니아의 자갈 해안이나 어두운 숲속으로 훌쩍 나들이를 떠났다. 그들에게는 명료한 목표나 특화된 기술, 값비싼 장비가 있지 않았다. 여가 활동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단순해서 본인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 활동을 즐겼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무도 사지 않을 예술품과 공예품, 모닥불이 꺼지는 순간 가치가 증발해버릴 음악 공연이 그런 활동에 속했다.


어린 시절 나는 천연 식품이 가공 식품보다 낫다는 개념을 수긍하는 게 어려웠다.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이 없었더라면 캐롭1970년대 미국에서 천연 식품 운동이 유행했을 때 초콜릿을 대체할 음식으로 각광받았던 암갈색 열매.이나 양조효모, 맛이 이상한 허브티 같은 건 입에 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배움이 즐겁다는 사실은 누가 일부러 납득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들에 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게 취미였다. 세계 기록, 전사자 수, 생물의 적절한 분류, 월식의 속성, 그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열렬히 토론했다. 결국은 궁극의 참고 도서인 사전, 백과, 연감을 동원해야 끝이 나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해결책조차 우리에게 전적으로 흡족하지는 않았다. 참고 도서를 펼치면 새로운 토론과 논쟁에 사용할 무기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열심히 찾아내거나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지식이 현실적으로도 유용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오빠와 나는 야생 동물에 푹 빠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바다 생물에 관심이 많아서 펭귄 17종을 꿰고 있었고, 고래의 먹이 습관에도 해박했다. 동네 해변에는 커다랗고 살찐 바다사자가 종종 나타나곤 했다. 녀석들이 보이지 않을 때면 우리는 책을 읽거나 지역 과학박물관으로 향했다. 전시된 고래 뼈를 들여다보면서, 때로는 녹음된 돌고래 소리를 재생하는 버튼이 달린 두꺼운 돌고래 수조 앞에 서서 우리는 애정의 대상들을 연구했다. 한편 봉제 인형도 엄청나게 모았다. 인형들은 하나의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더니 작은 바다코끼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우리는 인형들을 위해 헌법을 만들었고, 시가詩歌를 작곡했으며,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야기를 지어냈다. 우리는 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동물들에게 인간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상상을 통해 동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그러모은 무수한 사실들과 우리가 펼치던 유희적 상상의 이면에는 아직 형체를 이루지 못한 묵직한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보고, 느끼고, 먹고, 헤엄치고, 끽끽 소리를 내는 게 삶의 전부일까? 우리는 자연의 일부일까, 아니면 어떤 의미로든 자연 밖의 존재일까? 아버지와 캠핑 여행을 떠난 어느 날, 나는 빼곡한 삼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계곡 바위에 앉아 아버지와 그 질문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나로서는 우리 인간이 우리를 둘러싼 숲이나 흐르는 물줄기나 바위와 동일한 존재라고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스러운 것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 마지막 숨결을 내뱉고, 우리의 모든 것이 무게와 저항과 부패와 발효 작용 앞에서 스러지고, 우리의 살은 동물들의 식도를 지나 흙과 점액과 먼지가 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우리 가족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배움에 관심을 품고 지적 활동을 한 건 아니다. 부모님은 공부가 다가올 인생을 위한 준비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가 집을 떠나 세인트존스 칼리지라는 뜬금없이 종교적인 이름을 지닌 미국 동부 해안의 작은 세속적 문과 대학에 진학해 고전과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들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두 분은 내게 서사시나 식물에 대한 고대 논문을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을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공부가 세상 속에서 나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으냐고도 묻지 않았다. 내 선택이 미리 정해진 길처럼 여겨진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오빠는 나와는 딴판으로 생화학 분야에서 전문 교육을 받았다. 내가 누군가의 권유나 설득으로 인문학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우리 눈에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하나인 인문학 교육의 가치가 뚜렷이 보였다.


그렇게 극적인 성장과 설렘을 수반한 나의 첫 학문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적을 두게 된 작은 대학에 한눈에 반했다. 물가에는 수양버들이 드리워 있고, 비탈의 잔디는 여름에는 몸을 구르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기 안성맞춤이었다. 지진의 위험으로 벽돌을 쓰지 않는 지역에서 갓 도착한 나의 눈에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들조차 하나같이 매력적이고 놀라워 보였다. 나는 커다란 원목 책상 하나와 낡은 등나무 의자들, 휘어진 칠판이 전부인 빈약한 교실이 금세 편안해졌다. 수업은 커리큘럼 없이 진행되었다. 학생과 선생이 교실로 들여온 생생한 질문들로부터 자유롭게 토론이 펼쳐졌다. 그러니 우리의 토론은 무관심이나 준비 부족으로 난항을 겪을 수도 있었고, 조용히 탄력을 더하며 서서히 펼쳐질 수도 있었고,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는 흥분으로 폭발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정직한 수업 방식이 마냥 황홀했다. 책처럼, 질문처럼,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토론은 그렇게 꾸밈없이 흘러갔다. 우리가 하고 있는 정신 활동의 불편을 덜기 위해 억지로 뭔가를 명료하게 만들거나 구조를 갖다 붙이는 일은 없었다. 질문의 어려움과 위험, 발견의 짜릿함,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어떠한 완충재도 없이 오롯이 감각했다.


저녁에 시작된 세미나는 어느덧 계단으로, 안뜰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요일 저녁 공식 강의에 뒤따르는 질의응답 시간은 끝없이 길어지기 일쑤였고, 좋은 주제 하나만 있으면 자정을 넘겨 이른 새벽까지 생기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선생은 지쳐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학생들은 더 하자며 열의를 불태웠다. (지금도 세인트존스에선 이런 철야 토론 풍습이 여전하다.)


그때 우리는 하나같이 책이 인생에 중요하다고 믿었지만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워낙 적었으므로 우리 딴에는 진지했던 사색이 성숙한 사람에게는 분명 터무니없게 들렸을 것이다. 모든 책이 다른 모든 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문법이나 기하학의 아주 미묘한 기술적 요소들은 낭만과 의미로 채워져 있었으므로 지나치게 명쾌한 단정은 어딘지 투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통찰력을 발휘하는 느낌을 사랑한 것에 비해 통찰 자체에는 미숙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우리의 생각을 소중하게 대우했고, 나아가 우리를 의미 있는 선택을 내리고 매우 어려운 사안을 직접 결정할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성인으로 대했다. 나는 선생님들이 있는 힘껏 우리의 성숙함을 이끌어내려 한다고 느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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