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8

장애와 사랑, 실패와 후회에 관한 끝말잇기

저자소개

저자 · 하은빈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우리말로 옮겼다. 불구의 몸, 상한 마음, 잘못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가까운 이들의 어수선한 사랑과 돌연한 용기에 기대어 여기까지 왔다.

1장

정말인 순간들


얼마 전에 우와 내가 출연했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거기에는 오 년 전의 우와 내가 있었다. 전동휠체어 ‘동이’를 몰고 학교에 가는 우. 동이 뒤에 매달려 함께 언덕을 오르는 나. 노랗고 육중한 리프트에 실려 KTX에서 내려오는 우. 짐이 주렁주렁 달린 동이의 등을 바라보는 나. 장애인 콜택시 안에서 문재인 성대모사를 하는 우. 그 성대모사를 성대모사하는 나. 책방 거리의 가파른 계단을 지나치는 우리. 겨우 부산 여행에서 그렇게나 신이 난 우리.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는데, 우리가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있나? 우와 있었던 오 년은 전적으로 불쌍해 보이지 않으려는 투쟁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힘들지 않았다고 하긴 어려울 시간 동안 내가 계속 우의 곁에 있었던 이유는 내가 유별히 착하거나 우가 극진히 잘해주거나 우리의 다른 무엇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와 있는 것이 웃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짜로 즐거웠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면 사람들에게 그걸 알게 하고 싶었다. 우리는 어떤 불구의 상태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상태도 아니고 그냥 즐겁다고. 우와 나는 어딘가 찌그러지고 상한 애들인데 우리에게 그건 고통만은 아니며 도리어 그 사실을 귀하고 진기하게 여긴다고. 무언가 시작도 하기 전에 울지 않겠노라고 약속한다면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열어보이겠다고. 그건 자랑이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친구를 방에 데려가 아끼는 것을 보여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촬영은 고되었고 즐거웠다. 우리는 방송 내내 많이 웃었는데 그 웃음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진짜가 아닌 건 재미가 없고 우리는 재밌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까다로운 수집가들처럼 하찮고 조그만 ‘정말인 순간들’에 골몰했다. 사직구장의 객석에서 ‘롯데홈쇼핑’이라고 적힌 주황색 비닐봉다리를 부풀려 쓰고 롯데 자이언츠 응원가를 따라부르는 우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속에서 문득 내 이의 개수가 성인 평균치보다 네 개 모자라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우리. ‘매우 진지하지만 내면에 삼마이가 있는’ 뮤지션 요조의 뽕짝을 흥얼거리는 우리. 학교 축제가 한창인 잔디 광장에서 깡총거리며 근본 없는 춤을 추는 우리.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이고자 한 것들은 아주 잘 보였다. 우와 내가 얼마간 돌아버린 놈들이라는 것이, 우리가 언제나 재미에 진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시종일관 태평하고 철이 없고 쾌활하다는 사실이 판명났다. 그 모든 사실을 포함해 다큐는 하나도 안 웃겼다. 우리의 웃는 얼굴은 보기에 안쓰러웠고 전형적으로 불쌍했다. 나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화면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해바라기처럼 웃는 나. 웃는 나를 보며 웃는 우. 우를 재워놓고 우는 나. 내가 없는 데서 우는 우.


*


우에 관해 적는 것은 태양을 올려다보는 일처럼 어렵다. 


우와 보낸 시간은 뜨거운 볕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비춰주고 있다. 내 안에서 나고 자란 것들은 모조리 그 빛을 쬐었다. 오 년이 지났는데도 그 빛은 여전히 뜨겁고 눈부셔서 당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우와의 일을 나는 아주 잠깐씩만 들여다본다. 짙은 필름 조각을 들고 태양을 올려다보는 사람처럼. 딴청을 피우고 시간을 끌며. 필름 조각을 겹겹이 포개고 여러 차례 눈을 깜빡이며. 실은 대개 올려다보지조차 못하고 그 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들만 망연히 바라본다. 여기 쓰인 것은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쓰기에 실패한 것들이며, 쓰고자 했던 것의 그림자이거나 흔적이거나 사라짐이다. 시야는 번번이 다시 어두워지고, 이따금 데인 듯이 눈물이 흐른다.


우와 헤어지기 전에도 써보려고 한 적이 있다. 우와의 관계에 대해서. 우를 사랑하는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글은 쓰이지 않았고 어느 밤 나는 그 글을 쓰는 것이 필패의 기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글을 쓸수록 우와의 관계가 나를 말라죽이고 있음을,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나로 살 수는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후로 나는 돌연히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강경하고도 다급하게 도망을 갔다. 급작스럽고 비겁하게, 초라하고도 의뭉스럽게 줄행랑을 쳤다.


내내 생각해도 나의 결론은 같다. 우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떤 면에서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내내 의심하였다.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 태어나서 가져본 가장 귀한 것을 버려야 했다면……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여겼던 것을 내 손으로 내던져야 했다면……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겨우 나 자신이라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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