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희덕 시집
세포들
린 마굴리스는 말했지
진화의 가지런한 가지는 없다고
가지런한 가지는 생명의 궤적이 아니라고
한 번도 질서정연한 적 없는 생명,
생명의 덩굴은 어디로 뻗어갈지 알 수 없어
그야말로 소용돌이
칼 세이건은 말했지
우리는 아주 오래전 별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졌다고
빅뱅에서 만들어진 수소와 헬륨,
그 원소들로부터 왔다고
우리 몸에는
인간 세포 수보다 박테리아 수가 훨씬 많다지
박테리아 덕분에 살아가는 나날
물론 우리와 평생 함께하는 세포는 없어
길어야 7년이면 사라지니까
그래도 세포가 깨끗이 재생된다면
인간은 190년 정도를 살 수 있다던데
근육과 혈관 속의 세포들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중
대체 무엇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방금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간 사람,
그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세포 몇 개가 사라졌겠지
진화는 세포들 사이의 사건,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아름답고 복잡한 것은
박테리아와 미토콘드리아 덕분이라고 마굴리스는 말했지
진화의 가지런한 가지는 도무지 없다고
거미불가사리
눈도 없고
뇌도 없다
온몸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생각한다
깊은 바닷속에서도 알아차린다
포식자가 다가오는 것을
빛이 내려오거나 굴절되는 것을
심지어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다섯 개의 팔과 천 개의 초미세 렌즈로
먹이나 피난처를 찾을 수 있고
날렵하게 도망칠 수 있다
팔이 뜯겨나가도
신음 대신 빛을 내뿜으며 재생되는 몸
나는 절단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반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도망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아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재생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증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얽혀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교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회절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변화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제 눈으로 생각하고
뇌로 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거미불가사리처럼
거미도 불가사리도 아닌 어떤 극피동물처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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