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0

박선우 장편소설

저자소개

저자 · 박선우
2018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는 같은 곳에서』 『햇빛 기다리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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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깎기


사랑했던 기억은 어디로 가나.

어디에도 없는데 어디에나 있는 듯하다.


*


내 나이 서른일곱, 공군에서 회계병으로 복무한 이 년 남짓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엄마와 한집에서 살았다. 엄마 뱃속에서 꼬박 십 개월을 머물기도 했으니, 그걸로 떨어져 지낸 이 년을 얼추 상쇄하면 엄마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평생을, 함께.


이건 내 생각인데, 누군가와 같이한 세월이 지닌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영향이 세서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마저 사랑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엄마 같은 사람마저 사랑하게 만든다.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삼 년쯤 전이다. 그때 나는 맙소사, 내가 저 사람을, 저런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하며 놀랐다. 만약에 어느 날 엄마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신체의 일부를 훼손당하거나 죽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나는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겨우 추스르고 나서도 몇 날 며칠을 통곡하겠구나, 어쩌면 식음을 전폐한 채 따라 죽으려 할지도, 이런 미친…… 하며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일생을 함께 보냈음에도, 그래서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나는 도무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엄마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


물론 이해를 한 것 같은, 마치 그런 걸 해낸 것 같은 순간들이 더러 있기는 했다. 아, 알겠어, 저 아줌마가 왜 지금 나한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며 울분을 터뜨리는지 알겠어, 어째서 난데없이 사과를 한 접시 깎아다주며 눈웃음을 치고 가는지 알겠어, 무슨 연유로 내 책상 서랍을 마음대로 헤집어놓고 손도 댄 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는지 알겠어, 어쩌다가 좋아하지도 않는 샐러드를 잔뜩 사와서는 오,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데 너는 왜 안 먹어? 왜 안 먹지? 하며 혼자 꾸역꾸역 입에 넣는지 알겠어, 그래, 뭔지 다 알겠다고, 아마도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겠지, 맞아, 분명해, 바로 그런 걸 거야, 하고 혼자 슬며시 웃었던 순간들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이해라고 여겼던 순간들은 모조리 오해였음이 밝혀졌고…… 내게 엄마라는 사람은 늘 제멋대로에 철면피에 안하무인에 불가해, 그 자체로 돌아와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애초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긴 할까. 나는 나조차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엄마는 나를 낳아준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한때 하나였던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 싶었다. 그런 생각을 두서없이 이어가다보면 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 왜 살아야 하나 암담해졌다.


그러게, 왜 살아야 할까.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


3월 초순, 말간 하늘에 서늘한 바람이 불던 일요일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사골국에 밥을 말아먹는데 현관 쪽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덕하고 잠금장치가 풀렸을 때 나는 뒤돌아보았다. 엄마였고, 장을 보고 오는 길인지 한 손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야.”


엄마는 왠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새로 개업한 과일가게에 들렀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망고를 봤다고 했다. 기념으로 만원어치 구입했다면서 굳이 하나를 꺼내 밥 먹는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망고래.”


“웬 망고.”


그러고 보니 나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망고를 본 듯했다. 이전에는 항상 껍질이 벗겨진 채로, 편의점이나 뷔페에서 먹기 좋게 조각난 형체로만 본 탓이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의 망고는 젤리처럼 탱글탱글한 진노란색 정육면체에 가까웠는데, 엄마가 보여준 망고는 내 손바닥만한 크기의 길쭉한 타원형이었다. 꼭지가 달린 위쪽은 짙은 청록색이었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선명한 진홍빛을 띠었다.


나는 얼결에 망고를 받아들어 한 손에 쥐어보았다. 제법 두툼하니 묵직했다. 매대에서 햇빛을 머금고 있었는지 따뜻했고, 잘 익은 복숭아마냥 표면이 무를 줄 알았는데 참외처럼 단단했다. 단단해. 그제야 이것이 망고라는 실감이 났고, 뭔가를 실감하는 일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거 어떻게 먹어야 돼?”


엄마의 물음에 나는 생각해보는 척했다.


“글쎄, 껍질 깎아서 먹으면 되지 않을까.”


“색깔 좀 봐. 안 익은 거 맞지?”


“모르겠는데.”


알 턱이 없잖아, 라고 생각했다, 나도 오늘 처음 봤는데.


“이게 다 익은 상태일 수도 있지.”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런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면 네가 한번 깎아봐.”


엄마는 이내 심드렁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안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까보면 알겠지.”


나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손에 쥔 망고를 내려다 보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것은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본 망고였고 처음으로 함께 먹을 망고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는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을 우리의 처음들이 있을 터였다. 지극히 사소하지만 두 번 다시는 없을 처음들. 그 순간의 뭉클함과 환희 같은 것들. 엄마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지. 물어본들―물어보지도 않을 거지만―먹고살기 바빴어서 기억나는 게 없다는 답변이나 들을 것이 빤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그러곤 밑도 끝도 없이 타박을 놓겠지.


너는 참 팔자 좋은 소리나 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한 일? 대체 뭔 할 짓이 없어서 그런 게 알고 싶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고를 개수대로 가져갔다. 흐르는 물에 몇 차례나 씻고 과도를 꺼내 천천히 껍질을 벗겨냈다. 반 뼘쯤 깎았을 때 손가락 사이로 불투명한 과즙이 배어나며 열대의 향이랄까, 달고 눅눅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망고는 겉과 다르게 속이 노랬다. 내가 알던 망고 색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탄력이 거의 없어 조금만 힘을 줘도 맥없이 흐무러졌다. 나는 끈적끈적해진 손으로 남은 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그런 뒤 칼로 조각조각 먹기 좋게 썰어 희고 둥근 접시에 담아보려 했는데…… 편의점이나 뷔페에서 왜 손질이 다 된 망고를 내놓는지 알 것 같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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