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8

우리가 익혀야 할 거의 모든 법적 사고

저자소개

저자 · 워드 판즈워스
텍사스대 법학대학 학장이자 존 제퍼스 연구위원장. 보스턴대 법학대학 부학장을 지냈다. 미국 대법원의 앤서니 M. 케네디와 미국 제7순회 항소법원의 리처드 A. 포스너의 법률 서기, 헤이그에 있는 이란-미국 청구 재판소의 법률 고문으로 일했다. 웨슬리언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 법학대학원을 우등졸업했다. 법, 철학, 수사학, 체스 등에 관한 책을 저술했고, 법의 경제적 분석, 헌법, 법률 해석, 법학, 인지심리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왔다. 대표작인 『스토아 철학의 실천』은 “명료함과 흔들리지 않는 기조로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아름답게 서술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또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학식 있고, 박식하고, 우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판즈워스의 고전 영어 수사학』 『체스판 위의 포식자』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미국법학회의 『불법행위: 경제적 피해에 대한 책임』의 리포터이며, 불법행위법에 관한 판례집의 공저자이자 애스펀에서 발행한 배상법에 관한 판례집의 공저자다.
역자 · 노보경
고려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법학과에서 국제법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외교통상부 조약국 국제협약과 인턴으로 근무했고,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국제공법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 『스타트업의 거짓말』 『AI 메이커스, 인공지능 전쟁의 최전선』 『유리 멘탈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다』 『뉴노멀 시대 경제 시스템의 전환』 등이 있다.

1장

사전적 관점과 사후적 관점


은행에 강도가 들어와 한 고객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창구 직원을 향해 금고 안에 있는 돈을 꺼내라고 위협한다. 창구 직원이 움직이지 않고 버티자 강도는 고객에게 총을 쏜 뒤 달아났고, 총상을 입은 고객은 사망한다. 그러자 사망한 고객의 유족은 창구 직원이 돈5000달러에 불과했다고 가정해보자을 내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면서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사고방식이 가능하다. 첫째, 이 사건을 은행과 고객의 유족 간 분쟁으로 바라본다. 두 당사자는 비공식적으로 서로의 견해차를 좁힐 수 없어 법정까지 오게 된 것이다. 최후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판사의 판결은 법적 효력을 지니므로 양측은 판결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둘 중 한쪽이 승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승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우리는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고 은행이 원고에게 손해를 배상하는 게 정의에 합당한가를 따져 해답을 찾는다. 은행의 잘못으로 볼 만한 점이 있는가? 창구 직원이 돈을 내주지 않음으로써 은행이 손실을 입지 않았는데 그로 인한 피해자정확히는 그 유족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게 공정할까? 은행이 고객의 사망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그 친족보다 더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진 공정의 개념에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은행 청소부가 바닥의 물기를 미처 닦아내지 못해 고객이 미끄러졌다거나 혹은 고객이 곧 큰돈을 인출할 예정이라고 창구 직원이 도둑에게 귀띔한 탓에 은행이 법적 책임을 졌던 다른 유사한 사례들을 참고해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두 번째 방식은 다음과 같다. 그날 은행에서 발생한 사건은 불행한 일이지만 현시점에서는 부차적 관심사다. 이미 벌어진 일이며,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린들 과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족에게 돈을 지불하게 하거나 은행 직원에게 처벌을 내릴 순 있다 해도 그러한 결정은 재조정일 뿐 어떤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에는 늦었다. 그날 은행에서 (어떤 범죄나 사건으로 인한) 끔찍한 일은 바로 ‘손실’이다. 잃어버린 생명, 부서진 자동차, 깨진 창문 등 뭐가 됐든 일단 손해가 발생하면 세상은 더 빈곤해지며 돌이킬 수 없다. 살해당한 사람의 가족에게 이것은 직관적이고 명백한 사실이다. 법이 어떠한 판결을 내려도 고인을 살려낼 수 없음을 그들은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다. 이보다는 덜 명확하겠지만, 차가 파손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차는 수리 가능하고, 사고의 책임이 있는 자에게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이제 차 소유주는 법이 자신의 차를 기적처럼 (마치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살려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손실이다. 차 소유주가 아무리 만족한다 해도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세상이 더 나았다. 그 사건 때문에 다른 일에 쓰일 수 있었던 금전의 손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수리비를 지불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명확해진다. 핵심은 이미 일어난 나쁜 결과를 법이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엎질러진 물이니, 그에 따른 고통을 재분담하는 정도가 법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물론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책임을 묻고 책임 있는 자에게 대가를 치르도록 하면 감정적으로나마 피해자를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우리 모두의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법이 꿈꾸는 것그리고 모두가 바라는 것은 시간을 돌려 애초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뒤늦게 누가 고통을 감당하는 게 정당한지 다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방법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와 거의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하다고 하겠다. 법원은 앞으로 은행 강도 같은 끔찍한 사건이 덜 일어나게 해줄 만한 규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이미 벌어진 살인 행위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으나 미래에 벌어질 살인 행위는 방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공평한 효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한 건의 살인을 방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많은 사건을 예방할 수 있으니 공평함 이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나쁜 일들이 예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후 벌어지는 살인 사건에 대해 지금처럼 안타까워하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감정에 시달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법이 사건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새로운 시선을 얻는다. 사건 조사를 통해 누가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지 판결하는 대신 향후 그러한 고통을 겪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미래지향적으로 판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어떤 형태로 이어질까? 예컨대 은행 강도 사건은, 사람들이 이런 사건에 대해 어떤 유인誘因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가설을 떠올릴 수 있다. 법원이 원고의 손을 들어준다면, 향후 강도가 인질을 잡았을 때 은행은 법정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돈을 내줘야 할 유인을 갖게 된다. 다른 한편 도둑은 인질을 잡아야 할 유인을 얻는다. 사실 강도는 법률에 대해선 잘 모르며,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창구 직원은 항상 돈을 내줄 테고, 그로 인해 ‘인질을 잡는 게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테니까. 문제가 명확해진다. 이 사례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주면 미래에 ‘더 많은’ 인질이 생겨날 수 있다. 반면 강도는 돈을 손에 넣게 될 테니 인질이 총상당하는 사고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강도가 총을 꺼내 인질을 잡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순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은행은 고객의 유족이 제기한 소송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그날의 끔찍한 사건 과정을 되짚어보며 무엇이 공정한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올바른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은 승소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정부가 돈또는 다른 어떤 조건이든을 요구하는 항공기 납치범에게 굴복하지 않는 기본적인 이유와 같다. 이때 돈을 내준 뒤 승객의 생명을 구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돈을 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다시 발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내주면 발생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대하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살펴봤다. 전자는 ‘사후적ex post’ 관점으로, 이미 일어난 불행이나 사건을 되짚어보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결할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후자는 ‘사전적ex ante’적 관점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사건에 대한 판단이 앞으로 유사한 상황에 처할 당사자들, 그러니까 아직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지 못했으며 법이 선언하는 내용에 따라 자신의 선택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파급력을 지닐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은 당사자들의 입장을 정해져 있는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므로 정태적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의 관점은 그들의 행위가 판사 등 타인의 행위에 반응하여 바뀔 수 있다고 가정하므로 동태적이라 할 수 있다.) 사법적 판결을 흥미롭게 만드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는, 법원이 사건을 판단할 때는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이 두가지 관점을 함께 고려한다는 점이다. 법원의 판결은 당사자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다른 이들을 위해 규칙을 만드는 것인가? 대부분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 


이 장에서는 (그리고 대체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사전적 관점을 강조한다. 사전적 사고는 수많은 흥미로운 생각과 논쟁을 가능하게 하고 일반적으로 사후적 사고보다 더디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사후적 관점에 따라 사고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 불행한 사건을 두고 격렬히 책임 공방을 벌이는 두 당사자가 있다. 이들의 관심은 과거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판결에 집중되어 있다. 이 판결이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하는 것보다 누가 승소하는가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특히 우발적 사고와 관련된 사건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제시한 은행 사건은 반복해서 발생 가능한 사례를 다루는 것으로, 이기는 것과 규칙을 만드는 것 모두가 고려 사항이 된다.) 그러나 법원은 당면 사건의 승자를 선언함과 ‘동시에’ 장차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부여하는 규칙을 만드는 주체이므로 두 관점 모두를 신경 써야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법원은 은행 창구 직원과 관련된 문제를 판단할 때 앞서 살펴본 사전적 관점에 근거해 은행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일리노이주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사건의 판결이 가혹하고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유사한 사건에 연루될 당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범죄자에게 또 다른 무기를 쥐여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전적 관점에 따른 주장은 사후적 관점에 따른 주장에 앞선다. 가능할 때마다 사전적 관점에 따른 주장을 펼 수 있도록 배우는 것, 다시 말해 과거만 들여다보게 하는 단서로 가득한 사건에서도 사전적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실질적 과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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