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에 휩쓸린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들
1
기술이 앞질러 간 길을
따라가야 할 때
우린 삶의 레퍼런스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되는 거예요?”
한 고등학교에 강연을 갔을 때 받은 질문이다. 종종 학교나 공공기관 등에서 AI를 비롯한 테크 산업의 현황과 문제점 등을 개괄적으로 발표하곤 하는데, 이날도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마친 참이었다. 궁금한 점이 있는지 묻자마자 고요해진 장내에서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니 이렇게 물은 것이었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대체’되지 않겠냐고.
이미 강연 중에 슬라이드로 여러 리서치 업체나 언론사에서 예측한 ‘대체 불가능한 직업군’을 보여주긴 했는데, 학생은 그보다는 내 생각이 궁금하다고 했다. 글쎄, 나라고 어찌 알겠는가. 글을 쓸 때든 강의를 할 때든 나에게 한 가지 철칙이 있다면 미래의 일을 섣불리 예측해 답을 내놓지 않는 것이다. 내가 답변을 한참 망설이자, 질문하려고 일어섰던 학생은 이런 말을 덧붙이곤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해서 삶의 롤모델이라거나 레퍼런스 같은 게 없어진 느낌이에요. 부모님도, 선생님도, AI가 있는 시대를 살아본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옳다. 우리는 아무도 AI가 있는 시대를 미리 살아보지 않았다. 물론 이전의 어른들이라고 미래를 미리 경험하고 진로를 조언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가
학창 시절, 부모님은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다. 내가 대학교를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국어교육과는 아니었지만, 국문과에서도 성적 상위권 학생에게는 임용고시를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입을 앞둔 내게 부모님이 직업으로 선생님을 권한 건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IMF 시절을 겪으며 갑작스럽게 구조조정을 당했다. 평생 쉬어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상태에 놓였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진폭이 큰 시기를 겪은 만큼 부모님은 내가 무엇보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닐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부모님이 주는 정보와 학교에서 마주하는 선생님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나는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어떤 것인지 탐색하고, 또 궁금한 것들을 모으며 내게 이 직업이 맞는지를 고민했다. 당시 내 고민은 어디까지나 교사가 내 적성에 맞는지, 내 성적이 교직 이수를 할 수 있을 만큼 높은지, 그리고 내가 임용고시를 통과할 수 있을지 정도였다. 내가 직업을 선택할 시기에 그 직업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직업이 없어진다니? 오히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직업이 새로 생길 것 같은지를 신이 나서 상상하곤 했다. 30년 후에는 우주 여행도 가능하겠지? 우주 여행 컨설턴트 어때? 빨리 자리 잡아야겠다, 그렇게 떠들던 장면이 내 유년 시절의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내가 친구들과 미래에 생길 직업을 상상하며 웃고 떠들었다면, 지금 청소년들은 어떤 직업을 선택해도 결국 AI에 대체될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에 잠겨 있다. 문과, 이과, 예체능 계열 할 것 없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얼굴은 침울해 보였다.
“야, 미술은 이미 끝났어. 미드저니 봐봐.”
“뭘, 문과가 더 심하거든?”
서로 장난치듯 옆구리를 쿡 찌르며 오가는 농담이 내 귀에도 들렸지만, 장내 분위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물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고민하는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현업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수가 AI로 인한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2024년 4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직업을 가진 20-50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33.6퍼센트가 생성형 AI로 인해 업무가 대체될 수 있으리라고 밝혔다. 대체 예상 시기에 대해서는 70퍼센트 넘는 사람들이 10년 이내라고 응답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10년 안에 AI에게 대체될지 모른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게다가 이 통계가 언젠가 AI가 누군가의 직업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냐는 모호한 질문이 아니라 ‘본인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을지 물었다는 데서 ‘대체될 것이다’라고 답한 33.6퍼센트라는 숫자는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열 명 중 세 명은 자신의 업무가,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 자체가 AI에 대체될 수 있으리라 예측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우리가 바라는 직업이 없어지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하는 학생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답변은 하나였다.
“지금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이 있다면 AI가 대체하지 못하게 막는 수밖에요.”
결연한 연설가처럼 목소리 높여 외친 말은 아니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나로서는 내놓을 수 있는 답이 그것밖에 없었다. AI가 대체할 미래에서 살아남는 법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발전하는 기술에 저항해 분투하고 쟁취하는 법만큼은 레퍼런스가 있으니까.
가장 근접한 레퍼런스는 2023년 초 미국 할리우드의 미국작가조합WGA, Writers Guild of America 파업 사건이다. 1만 명 넘는 조합원이 148일간 파업을 벌였다. 1988년 154일 파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파업이었다. 특히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의 작가들의 파업에 동참하는 등 긴 기간뿐 아니라 큰 규모 역시 기록으로 남았다.
파업의 주요 안건은 OTT 플랫폼의 수익 배분이었다. OTT에서 스트리밍되는 콘텐츠가 아무리 큰 인기를 끌더라도 작가들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 콘텐츠 스트리밍 횟수 같은 데이터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작가조합에서는 넷플릭스에 시청 기간 등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에 따라 작가들에게도 수익을 재분배하라고 요구했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이 포함된 영화·TV제작자동맹AMPMP이 스트리밍 횟수에 따라 재상영 분배금을 인상해 작가들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하면 파업은 끝을 맺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최종 타결된 합의안에는 AI와 관련한 규제안도 포함됐다. 합의문에 따르면 작가는 각본을 작성하는 데 AI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으나 회사가 작가에게 AI 서비스를 사용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또 작가가 쓴 각본이 AI의 학습에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작가가 제출한 각본을 제작사가 임의로 AI 서비스에 업로드하여 수정하는 것이 금지됐다.
이 합의안의 훌륭한 점은 기술의 유익은 얼마든지 사용하되 그 때문에 노동 인력을 줄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의안에서는 AI 서비스를 사용하는 주체와 그 사용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함과 동시에, 드라마 시리즈 편수에 따라 반드시 고용해야만 하는 작가 수를 명시했다. 6회분 드라마에는 작가 세 명, 7-12회분 드라마는 다섯 명, 13회 이상인 경우에는 여섯 명을 고용해야 한다. 미국작가조합의 합의안은 최신 기술을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면서도,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 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참고 사례라 할 만하다.
기술이 사람을 추월할 때
19세기 영국에서의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기술과 사람의 투쟁사에서 늘상 호출되곤 한다. 러다이트 운동 당시 노동자들은 섬유를 가공해 실을 뽑는 방적기를 파괴했었다. 19세기 초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방적기가 발명되어 실을 기계로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 이 일에 고용되었던 숙련공들이 모두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방적기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들이 밤에 공장에 잠입해 방적기를 때려부순 운동이어서 흔히 러다이트 운동을 ‘기계 파괴 운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상은 다르다. SF 작가 테드 창은 2023년 〈뉴요커〉에 기고한 칼럼에서 러다이트를 단순한 반기술anti-technology 운동이 아니라 경제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으로 소개한다.
러다이트는 기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지 않았고, 기계의 소유주가 노동자에게 충분한 입금을 지급하면 기계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러다이트는 기술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의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공장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기계를 파괴했습니다. ‘러다이트’라는 단어가 비이성적이고 무지한 사람을 부르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은 자본의 세력에 의한 명예훼손 캠페인의 결과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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