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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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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 | 홈스쿨링생활백서 대표

 중학생 시절에는 독서 활동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1교시 동안 다 함께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시간이다. 지루하고 쓸모없다며 이 시간을 싫어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책을 사랑하던 나에게는 이 ‘도서관 시간’이 선물 같은 휴식이었다.

‘도서관 시간’에는 이상한 절차가 하나 있었다. 모두 선생님 앞에 늘어서 있다가 제 차례가 오면 오늘 읽을 책을 내민다. 선생님은 그 책이 유익한지 아닌지 살펴본다. 말하자면, 도서 적합성 검사다. 이 검사에서 통과한 자만이 독서를 시작할 수 있다. 만화책을 들고 와 번번이 퇴짜를 맞는 아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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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읽던 ‘해리포터’ 원서를 챙겨갔다. 수백 쪽에 달하는 영문 소설을 읽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번역판을 외우다시피 탐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책의 원문을 읽어본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당연히 아무런 문제 없이 검사를 통과하리라 생각했건만, 돌아온 건 “장난치지 말고, 다른 책 골라 와”라는 싸늘한 한마디였다. 선생님은 내가 내민 책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탈락. 결과는 탈락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고 두꺼운 책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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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도서관 책 아니고 제 책인데요….” 형언하기 힘든 억울함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가 고개를 푹 떨구자, 뒤에 서 있던 친구가 불쑥 끼어들어 내 편을 들어주었다. “진짜예요. 혜교가 쉬는 시간마다 읽는 거 제가 봤는데요.” 선생님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휘휘 저으며 가 보라고 답했다.

그전까지 나는 ‘읽어도 되는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의 기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읽는 책이 후자에 속하리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보지 않았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책인데 어쩐지 덮어버리고만 싶었다. 나의 독서 인생에 처음으로 먹구름이 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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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이자 작가가 된 지금, 강단에 오르면 이런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어떻게 하면 대표님처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데 정도는 없겠지만, 책을 싫어하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을 외워두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책 좀 읽으라며 꾸준히 잔소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독후감을 쓰라고 강요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흔적도 없이 달아날 테니까. 만약 독서의 씨를 영영 말리고 싶다면, 아이가 어떤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그 책을 빼앗아버리고, 더 좋은 책을 찾아내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도서관 시간’에 만화책을 읽으면 좀 어떤가. 너무 어려운 책을 골라 한 시간 동안 세 쪽밖에 읽지 못하더라도 또 어떤가. 책을 고르는 일은 독서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수백, 수천 권의 책 사이에서 헤매는 일.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열 쪽쯤 읽어보니 영 아니어서 덮어버리는 일도 중요한 경험이다. 그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배운다. 책을 고르고, 책장을 넘기는 기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