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은 따뜻한 마을이 키워냈다. 극 중에서 애순 역시 “사람 하나 살리는 데도 온 고을을 다 부려야 했다”며 그 진리를 고백한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어른이 되어 자식까지 잃은 애순이 굶어 죽지 않고 서러워 죽지 않았던 이유는 관식의 사랑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돌봐준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빠져 몽글몽글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동안, 전 세계는 또 하나의 드라마에 들썩이고 있었다. 넷플릭스 4부작 ‘소년의 시간’(사진). 지난달 13일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고, 93개국 넷플릭스 톱10을 유지하더니, 한 달도 안 되어 역대 영어 드라마 부문 통산 4위에까지 올랐다. 놀라운 성적이지만, 우리가 이 드라마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단지 ‘역대급’ 흥행 때문만은 아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
어른 무관심 속 살인범 된 아이
‘혐오의 괴물’ 우리 곁에는 없나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3월 의회 연설에서 이 드라마를 자녀와 함께 볼 것을 권했고, 이후 영국 정부는 중고등학교에서 이 드라마를 시청하고 토론할 것을 지시했다. 뉴욕타임스·가디언 등 주요 언론들도 이 드라마의 문제의식을 짚으며 연일 분석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이 드라마에는 공동체가 함께 곱씹어야 할 질문이 있다는 뜻이다.
13세의 소년 제이미는 여자 동급생을 죽였다. 앳되고 귀여운 외모의 제이미는 우등생이고, 착하고 똑똑하다. “내가 안 죽였어!”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범죄 장면이 담긴 CCTV를 부모가 보고 난 뒤에도 의심하고 싶지 않을 만큼 절실하다. 드라마는 이 청소년 범죄에 대해 ‘누가, 어떻게’가 아니라 ‘왜 그랬을까’를 묻는다. 호기심이 아닌 진지한 질문과 성찰을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당 한 시간 분량을 단 하나의 롱테이크로 담는 대담한 연출로 이어진다. 카메라는 마치 우리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이 참혹한 현실을 끝까지 똑똑히 바라보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겨우 이끌어 낼 수 있는 답은 이것뿐이다. ‘아이 하나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 소년의 동네는, 그가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조금씩 돕는다. 마을 전체가 한 아이를 죽이는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영국 소년의 동네는 우리 동네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을.
3화, 소년원에서 심리상담 교사와 나누는 숨 막히는 대화 장면은 해답의 단서를 보여준다. 처음엔 다소곳하던 소년은 “너는 여자애들이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에 흔들린다. “난 못생겼어”라고 대답하던 그는 서서히 내면의 분노를 드러낸다. “근데 상담교사라면 내가 못생기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비꼬기 시작한 그는 잠시 뒤 악마처럼 돌변해 여자 교사를 위협한다. 드라마는 소년에게 일어난 보이지 않는 사건들을 짐작하게 한다. 사춘기를 지나는 소년들은 여자 친구를 향한 성적 매력으로 서로를 평가한다. 그 기준에서 밀리면 ‘인셀(involuntary celibate·비자발적 독신주의자)’ 취급을 받고, 최하위 계급으로 낙인찍힌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와 학교에서 따돌림을 겪는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인 분노는 어느 날, 여성 혐오와 결합한 폭력으로 폭발한다.
그런데,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가정적이고 성실한 아버지 에디가 있었다. 하지만 처음 경찰서에서 아들이 붙잡혀 왔을 때 그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다. 대신 반복하는 말은 “시리얼 먹어”뿐이다. 우리 주변의 익숙한 아버지가 떠오른다. “공부 잘하지? 용돈 필요해?” 같은 말밖에 못 거는. 곁에 있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 어른. 아이는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 사랑’ 속에서 길을 잃는다. 나중에 에디가 아들을 진심으로 껴안는 순간은 모든 것이 무너진 뒤다. 위로가 아니라 공멸의 포옹만이 남는다. 결국 소년의 시간은 어른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아이를 잃고 나서야 울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함께 생각할 가치가 있다. “아버지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하고도 위험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 세대의 도덕적 몰락을 탓하거나, 아이들의 비행에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왜 아이들은 폭력에 이끌리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는가? 더 늦기 전에 살펴봐야 한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은 아이들이 마주한 현실을.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도 모른 채 소셜미디어 속 왜곡된 남성성의 신화만을 흡수하며 혐오의 괴물을 마음속에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괴롭지만 이 드라마를 봐야 할 이유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