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순철의 이래서 베스트셀러
최근 서점가에는 ‘필사 열풍’이 뜨겁다. 어린이부터 어른을 위한 필사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필사책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필사책 인기의 원인을 ‘스마트폰 시대의 디톡스’ ‘문해력과 어휘력 확장을 위한 도구’ 또는 젊은이들에게 활자가 다시 인기를 끄는 현상인 ‘텍스트힙’ 등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필사는 가장 대표적인 아날로그적 행위로, 자극적인 영상과 빠른 호흡의 숏폼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차분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필사 열풍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어른의 품격을 채우는 100일 필사 노트’(청림Life), ‘어린이를 위한 철학자의 말’(윌마), ‘너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말’(퍼스트펭귄), ‘아이에게 들려주는 부모의 예쁜 말 필사노트’(상상아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마인드셋) 등이 지난해부터 필사 열풍을 주도하는 책들인데, 이 책들의 저자가 모두 같은 사람이다. 심지어 최근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퍼스트펭귄)와 ‘부모의 질문력’(다산북스)도 같은 저자의 책이다.
작가를 검색해보면, 이렇게 소개돼 있다. “김종원 작가는 정식으로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그는 그저 글을 쓰는 게 좋아서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연구하며 그들의 문체를 익혔다. 그는 열심히 필사도 하고 국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며 새롭고 멋진 단어를 발견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에는 “20여년간 집필한 책 100여 권, 누적 판매량 120만 부를 기록하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인문학 커뮤니케이터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오픈 채팅방까지 개설해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과 필사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니, 최근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필사 열풍의 진원지가 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뭐든지 지나치면 탈이 나는 법. 필사 열풍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책이 점점 얇아지고, 내지에는 여백이 늘어난다. 책인지 노트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책의 문구화’가 진행되고 있다. 북커버, 북마크, 스티커, 형광펜 등 여러 문구 용품을 활용해 책을 꾸미는 ‘책꾸’도 요즘 인기다. 각종 화려한 용품으로 책을 꾸미고 ‘#책꾸’ 해시태그와 함께 소셜미디어에 전시하는 것이 인기를 끌면서 관련 매출도 크게 늘고 있다. 출판사들이 앞다퉈 스티커나 굿즈를 포함한 ‘한정판 책꾸 에디션’을 선보이는 등, 책을 꾸밀 수 있는 관련 용품을 끼워 넣고 있다. ‘책의 팬시화’다.
여기저기서 ‘읽는 책’은 너무 안 팔린다고 난리인데, 서점 매대 위에는 ‘쓰는 책들’과 ‘필사 노트’들이 즐비하다. 책을 파는 공간에는 사람이 뜸한데, 문구 코너에는 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형형색색의 문구 용품을 고르느라 분주하다. 책은 어디로 가고 독서 관련 용품만 주목을 받게 된 걸까. ‘필사 열풍’과 ‘책꾸 유행’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출판 시장의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현상이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