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첫 숙제였다. 지도교수는 내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지도를 허락받은 터였다. 3차원 공간론의 고전이었는데, 너무 어려웠다. 마음이 급해졌다. 기초가 이 정도라니, 앞으로 배울 내용은 구만리겠구나. 도대체 언제 유능한 학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에 하루 만에 책을 다 읽었다. 글자만 눈으로 훑은 셈이다.
다음 날 찾아간 지도교수는 영국 신사답게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학창 시절에 그랬던 적이 있지. 그런데 그렇게 읽은 건 머리에 하나도 안 남더라고.”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억이다.

김지윤 기자
책은 생각의 매개체다. 컴퓨터의 음악 파일과도 같다. 겉보기엔 무의미한 기호의 나열 같지만, 한참 곱씹고 상상하면 비로소 속삭이기 시작한다. 때론 매혹적인 야상곡이, 때론 웅장한 교향곡이. 작고 은은하지만 분명한 소리다. 20세기 기하학의 혁신을 이끌었던 윌리엄 써스턴(1946~2012)은 ‘느린 독서’를 강조했다. “나는 훨씬 느리게 읽기 시작했다. 십분의 일, 오십 분의 일 속도로 단어 하나하나를 주목하며 읽었다.” 그는 많이 읽을 때보다 오히려 느리게 읽을 때 진정한 배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언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 후에… 수학이 내 안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 입장에서는 막막한 이야기다. 언제 그 많은 책을 다 읽으라는 걸까. 내 연구는커녕, 이미 알려진 내용도 따라가기 벅차게 느껴진다.
공부를 할수록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연구자의 인생은 짧으면서도 길다는 역설이다. 넓게 알려고 하면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정말 알고 싶은 주제라면, 아무리 방대해도 줄기를 따라가며 거의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바깥에는 벚꽃이 한창이다. 얕게 넓게만 보려 하면 아름다움도, 삶도 모두 찰나 같다. 하지만 깊고 은은하게 사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아닐까.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