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왜 한 출판사에서만 내세요?” 등단 20년을 바라보는 소설가 정유정(59)이 받는 단골 질문이다. 그는 등단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비룡소) 이후 출판사 은행나무에서만 내리 책을 냈다. ‘내 심장을 쏴라’(2009), ‘7년의 밤’(2011), ’28′(2013), ‘종의 기원’(2016), ‘진이, 지니’(2019), ‘완전한 행복’(2021), ‘영원한 천국’(2024) 등 소설은 물론 산문집까지. 한국 작가 중 이렇게 출판사 한 곳과만 계약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정유정은 “베스트 파트너이기 때문”이라고 답하지만, 여기엔 많은 사연이 생략돼 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정유정과 주연선(62) 은행나무 대표를 만나 내막을 들었다.

서로를 성장시킨 진득한 인연. 왼쪽부터 소설가 정유정과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김지호 기자

2007년 청소년문학상으로 등단한 새내기 소설가 정유정은 문단의 벽을 실감하고 있었다. “동화 청탁만 들어왔고, 제가 간호사 출신이라는 점이 너무 부각돼서 저를 프로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이게 아닌데 싶어서 재등단하기로 마음먹었죠.” 2009년 그는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로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에 도전해 당선됐고, 당시 주관사인 은행나무를 통해 책을 냈다. 얼마 뒤 담당 편집자가 “강남 교보문고에서 팬 사인회 일정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얘기를 듣고 웃었어요.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사인을 받으러 오냐고. 그런데 편집자 선생님이 큰소리치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줄을 쫙 설 거예요.’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고, 장난인가 했는데 진짜로 한다고 하니 갑갑하더라고요.”

무명에 가까웠던 소설가는 그날 한 시간 넘도록 사인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잠시 갸웃했지만, 정신없이 사인하고 악수하느라 바빴다. 나중에 의문이 풀렸다. 어느 독자가 블로그에 쓴 글을 봤다. “내가 강남 교보문고 거리를 지나는데 어떤 아가씨가 와서 ‘내 심장을 쏴라’라는 책을 쥐어주는 거야. 책을 드릴 테니 작가한테 사인을 받지 않겠느냐, 앞으로 굉장히 유명한 작가가 될 텐데 그때쯤 되면 사인받은 걸 좋아하게 되실 거라더라. 그래서 줄도 서고, 사인도 받고, 집에 와서 책을 폈는데, 밤새도록 읽었어. 다음 책은 사보려고.”(정유정의 기억에 따른 재구성) “우리 편집자 선생님이 얼굴에 철판 깔고 내 기 살려주려고 한 거잖아요. 그때 생각했어요. 은행나무에서 나를 차 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내 발로 안 나가야지.”

데뷔 초창기 출판사의 전사적 마케팅이 소설가 정유정의 심장을 쐈다. 사진은 2009년 열린 서울 강남 교보문고 팬 사인회 현장. /은행나무
2009년 정유정의 서울 강남 교보문고 사인회 모습. /은행나무

주연선 대표에게 정유정이란 샛별은 큰 리스크였다. 문학상 주최 측에서 당선작 ‘내 심장을 쏴라’를 보내왔다. 주 대표는 원고를 보는 순간 “이건 기회다!” 생각했다. 주 대표는 “힘 있는 문장과 역동적 서사, 압도적 몰입감에 끝까지 읽지 않고는 원고를 덮을 수 없었다”며 “우리 문단에 새로운 상상력이 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직원들은 반대했다. 출간 및 마케팅 비용까지 더하면 최소 3억원이 든다는 계산서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밀어붙였다. 사활을 걸고 마케팅전을 벌였다. 강남 교보문고 사인회도 그 일환이었다. ‘내 심장을 쏴라’는 출간 6개월 만에 10만부를 돌파하며 성공을 거뒀다. 다음 작품 ‘7년의 밤’은 그 이상이었다. 2000년대 이후 대표적인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다. 현재까지 100만부 가까운 누적 판매를 달성했다.

1997년 설립한 은행나무는 2000년대 들어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요시다 슈이치 ‘악인’ 등 일본 문학 출간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문학 출판에 시동을 걸었다.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 있는 소설, 즉 작품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에 주목했다. 그러나 주 대표는 “한국 문학 출간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 있었다”고 했다. 기존 문학 출판사들의 아성이 워낙 견고했다. 원고 청탁조차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이야기꾼 정유정이 등장했다. 은행나무의 출간 지향점과도 꼭 맞았다. 은행나무는 2~3년에 한 번씩 두툼한 정유정표 장편소설을 내며 문학 출판사로 입지를 다졌다. 주 대표는 “정유정 작가 책을 내면서 한국 문학 출간에 탄력을 받았고, 그 이익으로 2015년 문학 잡지 ‘악스트(Axt)’ 창간 등 문학 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로를 키운 셈이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주 대표는 “이제 싸운 이야기도 할까요?”라며 웃었다. 매번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작가와 출판사는 작품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다. 작가는 창작자로서 고집이 있고, 출판사는 독자를 우선 고려해 작가에게 이런저런 제안을 한다. 주 대표는 최근 작 ‘영원한 천국’ 출간을 앞두고 소설가와 다퉈 광주광역시에 있는 그의 집까지 찾아가 오해를 푼 일화도 소개했다. “미치겠다. 사장님 진짜 못 말려. 뭘 숨기지를 못하고, 거짓말을 못해.” 정유정이 다정하게 눈을 흘겼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소설가 정유정(오른쪽)과 주연선 대표가 마주 보고 웃었다. 정유정이 “제가 귀인을 만났다”고 덕담을 건네자 주 대표는 “책 낼 때마다 ‘핵 펀치’를 날려주시니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김지호 기자

“한번 다녀오시라” 정유정이 서운했던 한마디

정유정에게 출판사들의 러브콜이 쏟아지던 때가 있었다. 은행나무와만 계약한다는 사실이 덜 알려졌던 때다. 혹은 좋은 조건을 내걸면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타 출판사에서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등 각종 유인책이 쇄도하자 주연선 대표는 미안한 마음에 “저는 괜찮으니 (다른 출판사에) 한번 다녀오시라”는 말을 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정유정은 “엄청 서운할 뻔했다”며 웃었다. 주 대표는 “그때 안 다녀오셨기 때문에 서로 ‘윈-윈’인 상호 신뢰 관계가 쌓인 것 같다”고 맞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