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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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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역사 깊고 문학 전통 있는 도시들에 세워진 ‘토핑앤드컴퍼니’
독자에게 디지털이 줄 수 없는 특별한 경험 제공하는 독립서점
등록 2023-05-19 13:39 수정 2023-05-26 01:34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 건물이 서점이 됐다. 영국 바스의 토핑앤드컴퍼니 서점 외관.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 건물이 서점이 됐다. 영국 바스의 토핑앤드컴퍼니 서점 외관.

도시마다 공기와 햇살이 달라서일까. 도시의 냄새가 달랐다. 기차역에 내리면 먼저 크게 숨을 쉬고 도시의 냄새를 맡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도시를 꼽아보라면 영국 남부의 바스(Bath)를 첫손으로 꼽고 싶다. 바스라는 지명에서 목욕이란 말의 기원이 나왔을 만큼 로마시대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다. 기차역에서 북쪽 로열 크레센트까지 30분 이내로 걸어갈 수 있는 작은 곳이다. 하지만 바스는 여행자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매몰된 목욕탕과 미네르바 신전을 발굴하고 복원한 로만 바스(로마시대 온천)도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5년간이나 바스에 살았던 제인 오스틴과 관련한 이야깃거리도 챙겨야 했다.

바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도시

영국에서 펍(주점)을 뺀 나머지 가게는 일찍 문을 닫는다. 이르면 오후 4시, 늦어도 6시면 문을 닫는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문 닫은 책방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있다. 그러나 바스에서는 좀 느긋할 수 있다. 저녁밥을 먹고 7시께 서점으로 향했다. 밤 9시까지 문을 여는 ‘토핑앤드컴퍼니’(Topping&Company) 서점이 바스에 있기 때문이다.

토핑앤드컴퍼니는 2002년 영국 일리에서 시작해 현재 세인트앤드루스, 일리, 에든버러, 바스에 4개 지점이 있는 독립서점이다. 운 좋게도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지점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내가 본 토핑앤드컴퍼니는 모두 아름다움과 개성을 간직한 서점이었다. 에든버러와 일리와 바스에 있는 토핑앤드컴퍼니를 차례로 방문하며 이 독특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궁금해졌다.

바스의 토핑앤드컴퍼니는 로만 바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로만 바스와 가까운 거리지만 살짝 비켜나 소란하지 않고 고즈넉하다. 로만 바스에서 빠져나와 걷기 좋은 요크 스트리트로 접어들면 신전 같은 건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토핑앤드컴퍼니다. “이게 서점이 맞나” 싶을 만한 외관이다. 두 개의 기둥이 지지하는 돌출된 이오니아 양식의 건축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물론 토핑앤드컴퍼니가 처음부터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에서 서점을 한 건 아니다. 2006년 조지 왕조 시대 주택이 있는 거리인 파라곤에서 서점을 시작했고 2020년 지금의 건물로 이전했다. 1817~1818년 런던의 국립미술관(내셔널갤러리)을 설계한 건축가 윌리엄 윌킨스가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프리메이슨 홀로 설계했고 가장 최근에는 프렌즈 미팅 하우스(퀘이커 교도 모임지)로 사용됐다. 하지만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서점이 아닐까.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에 자리잡은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메인 홀이 무척 넓다. 홀의 네 벽에 손으로 짠 서가가 높게 서 있다. 주택을 개조한 에든버러 지점도 서가가 천장과 맞닿을 만큼 높았다. 서가가 높으니 책 속에 파묻힌 기분이 들었다. 현실과 거리를 둔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책의 신전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높은 서가 때문에 필요한 것이 있다. 도서관 사다리다. 토핑앤드컴퍼니에는 애서가의 로망인 회전식 도서관 사다리가 있다. 서점의 심볼이다.

바스 지점은 높은 층고를 이용해 테라스를 만들어 2층 서가를 꾸몄다. 테라스에 서면 서점 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슷한 경관을 지닌 서점이 우리에게도 있다. 서울 선릉역 부근 최인아책방이다.

토핑앤드컴퍼니는 가족 서점이다. 로버트 토핑과 루이즈 토핑 부부가 창업했다. 지점이 늘며 자녀인 휴가 바스 지점을, 코넬리아는 에든버러 지점을 책임지고 있다. 가족이 경영한다지만 각 지점은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일테면 일리와 에든버러의 책방에 진열하는 책이 다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토핑앤드컴퍼니 역시 어려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일리·바스·세인트앤드루스·에든버러 매장을 모두 폐쇄했고, 문학행사나 북클럽도 모두 취소해야 했다. 그러나 창업자인 로버트 토핑은 도리어 이 시기에 “독자들이 독립서점을 지지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2020년 말 서점은 네 지점을 모두 재개장했고 매출도 이전을 회복했다. 토핑앤드컴퍼니가 자랑하는 연중 문학 행사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2023년 4월에는 <희랍어 시간>의 영문판을 출간한 한강 작가도 토핑앤드컴퍼니 바스 지점을 다녀갔다.

바스의 토핑앤드컴퍼니를 둘러보며 서점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책방이 자리한 지역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토핑앤드컴퍼니는 특히 서점의 위치 선정에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다.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옛 건물이 있고 문학적 전통이 있는 도시에 책방을 세운다. 에든버러도 바스도 모두 그런 도시가 아닌가.

독자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서점 한쪽에 주방이 있다.

독자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서점 한쪽에 주방이 있다.

독자에게 차와 쿠키를 대접하다

인터넷서점이 알고리듬으로 책을 소개한다면 거리의 책방은 독자가 책을 발견하는 곳이다. 휴 토핑의 말처럼 “브라우징(정보검색)을 제공해야” 하고, 토핑앤드컴퍼니는 디지털이 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토핑앤드컴퍼니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면 직원이 다가와 “차를 드실래요?” 하고 묻는다. 처음 에든버러 지점에서 이 질문을 받고 돈을 내라고 할까봐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알고 보니 무료로 독자에게 차와 쿠키를 제공하는 게 서점의 전통이었다. 규모가 가장 작은 일리 지점에도 차를 대접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서점은 무엇으로 특별한 경험의 공간이 될까. 격식을 갖춘 차 대접을 받고 서점에 한동안 머물렀다면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해가 질 무렵 서점을 나오며 이런 생각을 했다. 멋진 책방이 있다면 그 도시는 분명 아름다운 곳일 테다.

글·사진 한미화 <동네책방 생존탐구> 저자

*안녕, 유럽 서점: 유럽의 서점을 돌아보며 우리 서점의 내일을 생각해본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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