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가 된 공부읽음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강연의 시대’라 할 만큼 곳곳에서 강연회가 열리고, 많은 독서모임에서 끊임없이 책을 읽고, 클릭 몇 번으로 필요한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왜 우리 사회의 교양과 지적 수준은 날로 쇠퇴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지난번 “언어소통, 지식, 의견은 이제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이기보다 시장의 소비재이자 서비스 상품이고, 그것을 구매하는 이는 다만 뼛속까지 소비자일 뿐”이라고 썼거니와, 이 이야기를 이어보고자 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출판사는 신간이 나오면 책을 알릴 마땅한 수단이 없어 저자 강연회를 열곤 하는데, 수십명의 독자가 모인 강연회에서 팔리는 책은 고작 몇 권에 불과하다. 강연을 듣는 것으로 다 이해했다는 태도다. 유튜브에 넘쳐나는 공짜 강의들은 잘못된 정보나 제멋대로 해석한 지식을 천연덕스럽게 제공하고, 이용자는 아무 노력 없이 그 콘텐츠들을 소비한다. 독서모임은 조금 낫다고 할까. 그러나 해묵은 베스트셀러와 말랑말랑한 책들을 읽느라 해가 지나도 독서 수준의 진전이 없는 경우를 흔히 본다. 나는 그나마 배움을 추구하고 자기 성장을 꾀하는 이들마저 지식을 스스로 만들기보다는 소비하는 습관에 젖은 탓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 습관이 우리의 정신적 영역에까지 깊이 침투한 결과인 것이다.

스스로 음식을 만들기보다는 밀키트로 한 끼를 차리는 모습, 클릭 몇 번으로 집 앞까지 배송되는 상품을 간단히 구매하고 쓰는 모습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지식을 소비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시간이 없고 요리에 자신이 없어서라는 변명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과 함께 가성비와 구매 효용을 따지고, 온라인 쇼핑과 같은 기술적 도구가 제공하는 편리성을 늘 계산에 넣고 있다. 가성비라는 이름의 효율과 인터넷과 같은 기술적 도구가 구매력 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무능한 소비자들의 천국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나 의견의 형성은 원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이는 사물의 세계와 역할 모델이 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하고, 커서는 또래와의 만남이나 연장자의 교정을 통해 차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제는 배움이 ‘교육 서비스’라는 이름의 공급과 소비 과정으로 바뀌면서 누군가의 전문적 가르침이 없으면 배움도 없다는 생각이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행위마저 쉬운 텍스트가 먹여주는 내용만 소화할 뿐, 그만큼 노력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깊은 의미의 연관, 저자와의 내적 소통은 포기한다. 읽기는 소비 행위이지만 이해는 생산과 창조의 행위다. 지식을 소비재로 구매한 독자는 후자와 같은 노력을 지불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해본 경험도 없다. 이렇듯 자신의 지식을 스스로 생산해보지 못한 ‘소비자’에게 지성과 교양의 쇠퇴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브라질의 위대한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1960년대 시골 마을에서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의미심장한 교육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가장 흔히 접하는 일상의 문제들을 가리키는 단어 수십개를 뽑아 그것으로 읽기 교육을 시도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물물 이용, 밭고랑의 경계, 세금 같은 단어들을 들고 왔고, 놀랍게도 여섯 주의 저녁수업만으로 읽고 쓰기를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고 한다. 프레이리는 배움이 삶의 정치와 떨어질 수 없음을 간파했고, 그 사람들은 배움과 더불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생산했던 것이다.

만드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존재 양식이 쇠퇴하고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만이 남은 이 시대에 반지성의 풍조나 가짜뉴스의 횡행이나 의견의 극단적 대립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구매하고 소비하는 지식, 의견 안에서 나는 마음껏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 가장 큰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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