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말’이라서

오은 시인

얼마 전 박희병이 쓴 <엄마의 마지막 말들>(창비, 2020)을 읽었다. 술술 읽혔는데, 이상하게 페이지마다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1년여 동안 어머니의 보호자이자 관찰자, 기록자였던 저자가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당신의 말들을 모아 낸 책이다. 호스피스 병동을 전전하는 일, 어머니를 위해 도토리묵과 손두부를 먹여드리는 일을 읽노라면 삶과 죽음의 존엄성에 대해, 사랑의 방식과 죽음의 방식에 대해 헤아리게 된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책머리의 다음 두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어머니의 한두 마디 말은 대체로 이런 극한 상황에서 이따금 나온 것이었으므로 얼핏 전후 맥락이 없고 의미 없는 말처럼 보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이 말들이 모두 의미가 없는 말들은 아니며 단지 의미가 해독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로 저자는 “공부하다 오나?”란 심상한 말에서조차 어머니가 자신의 공부에 신경 쓰고 있음을 깨닫고 당신이 살아 계시는 동안엔 공부를 안 하기로 결심한다. 심신이 고단해 혹여 자기도 모르게 불평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계가 말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박희병은 어머니가 툭 내뱉으신 “골치 아프다”라는 말에서 다양한 의미를 발견한다. 이는 죽지 않고 누워 있음에서 오는 한탄이기도, 자식의 귀한 시간을 뺏는 데서 오는 미안함이기도, 사는 게 힘들다는 의중의 우회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이 말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이렇게 적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 내가 깨달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상황은, 그리고 삶의 상황은, 다른 말이 필요 없고 ‘골치 아프다’라는 이 말 하나로 다 설명되는 듯하다.”

독서를 할 때 몰랐던 세계에 발 담그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자신의 경험을 겹쳐 읽으면 또 하나의 눈이 생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2년 전을 재빠르게 떠올렸다. 재작년 11월부터 작년 1월까지 아버지께서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다. 한 주의 절반은 서울에서, 나머지 절반은 호스피스 병동이 위치한 전주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당시에 이미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씹고 삼키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사람처럼, 음식물 앞에서 입을 앙 다무셨다.

어느 날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아버지 다리를 닦아드리는데 “시원해”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어린 시절, 대중목욕탕에 갈 때마다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일제히 “시원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린이에게는 왜라는 물음만 커질 뿐이었다. 갸웃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께서는 덧붙이셨다. “너도 크면 알아.” 이제는 커서 뜨거움 속에 있는 시원함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병상에 누워 계시는구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바로 “아이고, 죽겠다”였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말씀을 거의 하시지 않았는데, 가끔 튀어나오는 말이 죽음을 향해 있어서 몹시 슬펐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아이고, 살겠다고 해야지요.” 그때 아버지께서 지으시던 희미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몸부림을 치며 하시던 “집에 가자”라는 말씀에 “한 밤만 자고요”라고 답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책감이 든다. 이처럼 사람의 말일 때는 예사로운 것이 ‘그 사람의 말’이 될 때는 특별해진다.

오늘은 각별한 두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데 달인이니까.” 비행기를 태워준 기분이 들어 “오늘 내 생일이야?”라고 물었더니 “매일 생일 하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살아 있는 한, 매일이 생일이다. 난 날은 다 달라도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산다. 오늘도 기억할 말들이 모다기모다기 쌓여간다. 연말이 되면 그 말들을 가져다 가슴속에 모닥불을 피워야겠다.


Today`s HOT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황폐해진 칸 유니스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