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책방 좀 살려둡시다

김해원 동화작가

책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몇 년 전부터 신기하게도 지방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생겨났다. 오래된 골목길 모퉁이에, 낡은 기와지붕이 잇닿아 있는 동네 한구석에, 한적한 시골길 끝에 예전이면 구멍가게나 있을 법한 자리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책방은 대개 소박하고 간소했다. 오래전 동네에 하나쯤 있던 서점과는 달랐다. 사방 벽에 참고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지 않았고, 베스트셀러만 모아놓은 큼지막한 가판대도 없었다. 작은 책방에 헐렁하게 꽂혀 있는 책은 주인장이 고심해서 고른 것들이어서 책방마다 자기 빛깔이 있었다. 어느 책방에는 1인 출판사가 낸 책이 많았고, 어느 책방에는 그 지역에서 출판한 책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작은 책방에서 나는 온라인서점에서는 본 적도 없는 인디 가수의 에세이집을 샀고, 서울 대형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지역 고등학생들의 단편집을 사기도 했다.

김해원 동화작가

김해원 동화작가

동네 책방들은 책만 파는 게 아니었다. 한여름 밤에 음악회를 여는 책방도 있었고, 방학 내내 어린이책 작가와 어린이가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도 있었다. 남쪽 도시의 동네 책방에서는 고등학생들의 인문학 독서모임이 꾸준히 열리는데, 그 학생들이 동네 노인들의 생애를 듣고 정리해 책을 만든다고 했다.

동네 책방에서 본 책은 내가 본 책과 달랐다. 온라인서점이 생긴 뒤로 나는 인터넷에 접속해 들고 다닐 필요 없는 장바구니에 담으면 다음날 무료 배송되는 책만 봐왔다. 그것들은 분명 그냥 책이었다. 종이에 활자가 인쇄된,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무생물이었다. 하지만 동네 책방의 책은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생명이 있었다. 책방에서 책은 꿈틀거리면서 말을 시키고,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사람들은 책을 통해 이어졌다. 책을 팔아선 입에 풀칠하기 어렵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책방을 낸 사람들은 책의 무한한 힘을 아는 것이다. 무한하다 해서 거창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강화도 산기슭 까마귀 소리가 시끄럽다는 곳에 작은 책방을 낸 지인은 주말이면 동네에 사는 열여섯 살 형이 두 동생을 데리고 와서 한참 동안 놀다간다고 했다. 슬리퍼를 끌고 온 아이들이 차를 마시고, 책을 보는 모습이 좋아서 책방을 내길 잘했다고 하는 지인이 본 무한성은 나 같은 사람은 볼 수 없는 곳에 닿아 있다. 그 지인이 도서정가제를 지켜야 한다면서 국회 앞에 나가 시위를 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요즘 갑론을박하는 도서정가제를 들여다봤다.

사실 나는 글을 쓰는 생산자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내 생산품의 유통에서 소외되어 세상 돌아가는 대로 내맡기고 있던 터라 도서정가제가 시행된다고 해도, 그 도서정가제를 또 없애겠다고 해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었다. 비록 구경꾼이었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내 생산품의 판매를 지켜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 생산품에 붙은 가격표가 결코 판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범람하는 시대에 책 생산자로서의 바람은 심심한데 책이나 볼까 하고 서점을 기웃거리는 여유 있는 세상이, 아이들이 참고서에서 벗어나는 세상이 도래하면 좋겠다는 것뿐. 내 바람이 이뤄지기 어렵듯 도서정가제를 없애서 책의 할인을 자율에 맡기고 책값을 내리면 책의 수요가 늘어날 거라는 예측도 불확실한 미래다. 도리어 도서정가제를 없애면 그나마 도서정가제에 의지해 지탱하고 있는 동네 책방은 사라질 테니, 다양한 빛깔의 책을 동네 곳곳에 씨앗처럼 뿌리고 있는 확실한 미래를 거세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당신의 생산품을 정가제로 하겠냐 어쩌겠냐 고맙게도 물어봐준다면 나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동네 책방 좀 살려둡시다.


Today`s HOT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사해 근처 사막에 있는 탄도미사일 잔해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황폐해진 칸 유니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