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책이 도시를 천박하게 만드는가?

[장대익 칼럼]어떤 정책이 도시를 천박하게 만드는가?

‘신의 직장’으로도 불리는 국내 모 공기업이 이전한 혁신도시의 한복판에는 고구마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 고구마밭은 시민들에게 경탄이 아니라 탄식이다. “거기는 산학연 클러스터가 들어와야 하는 곳인데 분양 이후로 노는 땅이 돼 버렸어요. 청년들은 직장 때문에 주중에는 있지만 주말 되면 많이들 올라가요. 30분 거리의 대도시에 살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죠. 좋은 고등학교를 유치하려고 시도했지만 다른 지역의 견제로 실패했어요. 정책의 의도는 좋았지만 저 고구마밭만 보면 속이 터집니다.” 몇 해 전 학생들과 함께 혁신도시 탐방을 하다 알게 된 이 고구마밭의 사연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초우량 기업의 이전만으로 지방 도시가 재건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최근 당·정·청이 ‘국토 균형발전’ 플래카드를 일제히 들고 나왔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서울을 파리의 센 강변의 풍경과 비교하며 “우리는 한강변에 아파트만 들어서가지고 단가 얼마 얼마라고 하는데, 이런 천박한 도시를 만들면 안 된다”고 했다. 서울을 천박한 도시로 묘사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자 민주당은 “세종시를 품격 있는 도시로 만들자는 취지이며, 서울이 집값 문제 및 재산 가치로만 평가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 시즌2는 이렇게 시작됐다.

서울이 정말 “천박한 도시”인지 아닌지는 논점이 아니다. 여행자에게는 파리가 문화와 낭만의 센 강변이겠지만 힘겨운 도시 노동자에게는 천박한 도시일 수 있듯이, 서울도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의 측면에서 우리 도시들은 기형적이다. 국토균형발전위원회의 김사열 위원장의 지적처럼 “1000대 기업 본사 75%가 수도권에 있고 우리나라 인구의 50% 이상이 수도권에 살고” 있을 정도로 수도권은 이미 “고도비만”이며, 그래서 지방은 소멸 직전이다. 지방 도시에는 좋은 직장이 별로 없고, 있다 해도 청년은 서울로 떠난다.

게다가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19년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0.92명에 불과한데, 그중에서도 서울시는 0.72명으로 가장 낮다. 총인구의 50.16%가 거주하는 수도권(남한 면적의 11.8%)에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은 까닭에 대한민국은 1등 초저출산 국가다. 지방에선 떠나고 서울에선 애를 안 낳으니, 이런 추세라면 대한민국 소멸은 몇 세기도 안 걸린다. 소멸의 사이클은 다음과 같다. (청년의) 수도권으로의 이주, 지방 소멸, 수도권 인구밀도 증가, 수도권의 저출산, 그리고 다시 수도권으로의 이주….

정부도 나름 발버둥을 쳤다. 2006년부터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만들고 매년 10조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주로 보육 환경 개선과 청년 복지제도 확충에 예산을 집행했는데, 그렇게 복지가 나아지면 이 문제도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0.72! 반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지속된 이유는 무얼까? 정치인과 공무원이 ‘왜?’에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생태학에선 오래전부터 출산율에 영향을 주는 주요 변수로 인구밀도를 지목했다. 어떤 동물이든 주변에 개체수가 많으면 출산을 미룬다. 밀도가 높으면 낳아봤자 자손의 생존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애 낳기를 미루고, 적게 낳고 양육에 더 큰 힘을 쏟는데, 이런 현상은 전 세계 공통적이다.

자, 출산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서울시의 신혼부부가 있다고 해보자. 월요일 아침 지옥철 2호선에 겨우 올라타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주말에 내가 미쳤었지. 애를 가질 생각을 다 하다니….’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경쟁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서 번식보다는 자신의 성장에 투자할 동기가 더 많이 생기고, 그로 인해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행동전략을 수정한다. 심지어 웅성대는 소리만 들려줘도 출산 동기는 떨어진다. 따라서 정부가 좋은 의도로 복지 정책을 펼친다 해도, 결과적으로 도시의 인구밀도와 시민의 경쟁 민감도를 낮추는 방식이 아니라면, 효과는 없다.

2015년 9월15일, 당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정부기관은 미국 국민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 행동과학의 통찰을 사용”할 것을 주문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행동과학의 통찰’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가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의미한다. 그는 정부의 각종 정책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과 무관하게 또는 반대로 집행되고 있기에 적잖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학자들의 지적을 적극 수용했다. 정책의 심리적 작동에 대한 과학적 평가와 제안을 담당하는 ‘사회 및 행동 과학부서(SBST)’가 신설된 것도 그즈음이다. 이 부서의 연차보고서를 보면, 이 행정명령 집행으로 조세, 보험, 복지, 에너지 부문에서 상당한 정도의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 부서는 트럼프 정권에서 사라졌다.

만일 천문학적 비용이 걸려 있는 정부의 각종 정책들(저출산, 고령화, 일자리, 국토 균형발전, 부동산 등)을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에 비추어 선별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면 우리의 도시는 어떻게 달라질까? 오늘날 정책과 규제상의 혼란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시 모습이 최적인지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연구와 적용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 도시를 천박하게 만드는지는 안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탐구가 빠진 정책이다. 부동산이든, 수도 이전 정책이든, 인간을 이해해야 도시를 재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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