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괴롭다

장은교 토요판팀

2015년, 신경숙의 표절이 공론화됐다. 1994년 발표한 <전설>의 한 부분이 1983년 출간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흡사했다. 표절을 했다는 사실보다는 표절 이후의 일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경숙은 “작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니 대응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비판이 계속되자,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읽어보니 표절이란 문제제기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의 궤변을 접하곤 얼굴이 빨개졌다. 글이라는 건 그 사람을 바닥까지 담아내는 매체인데 이런 사람의 글을 읽고 그렇게 감동했었다니 부끄러웠다. 신경숙과 신경숙을 두둔한 소위 ‘한국 문단’이라는 세력에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장은교 토요판팀

장은교 토요판팀

2020년, 김봉곤의 소설이 서점에서 사라지고 있다. 김봉곤은 지인과 나눈 사적 대화를 수정 없이 소설에 썼다. 김봉곤과 출판사는 피해자의 항의를 외면하다 뒤늦게 문제가 된 부분을 수정했다. 수정된 사실을 공지해달라는 요구를 묵살했고, 피해자가 트위터에 공개적으로 알린 뒤에야 수습에 나섰다. 며칠 뒤에는 또 다른 피해자도 나왔다. 김봉곤은 문제의 작품으로 수상하게 된 ‘2020 젊은작가상’을 반납했고, 출판사들(문학동네, 창비)은 해당 작품이 실린 책들을 절판했다.

김봉곤의 다른 소설이 실린 책들도 절판처리되고 있다. 괜히 다른 수록작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 어떤 책은 김봉곤 소설만 빼고 수정돼 재출간되겠지만, 어떤 책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알면서도 방관하고, 책 홍보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출판사들과 ‘문단권력’은 그저 김봉곤의 수상 반납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출판사들은 작은 서점들과 상의도 없이 환불처리를 공지했다고 한다.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한 편 한 편이 너무 좋아 녹아드는 얼음을 붙잡는 마음으로 아끼며 읽은 책이다. 그 책이 ‘사건 현장’이 됐다. 의도치 않게 공범이 된 기분이다. 더럽고 억울한 기분.

출판편집자로 10년간 업계에서 일했다는 김봉곤의 피해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전처럼 일할 수 있을까. 김봉곤의 소설 때문에 성정체성을 ‘아우팅’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는 안전하게 살고 있을까. 두 피해자는 놀랍게도, 문제제기를 통해 김봉곤이 받을 타격과 상처를 걱정했다. 올해 초 이상문학상 출판사의 갑질계약을 알게 된 뒤, 지난해 대상을 수상한 윤이형 작가는 절필을 선언했다. 신경숙은 지난 6월 5년 만에 새 소설 연재를 시작했다. 피해자는 피해를 ‘호소’하며 증명해야 하고, 가해자는 생각보다 쉽게 돌아온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저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만으로 상처를 입는다.

화장실도 못 가며 과로하는 마트 노동자들을 취재한 뒤 한동안 마트에 가지 못했고, 실적과 폭언에 고통받는 콜센터 노동자들을 취재한 뒤엔 ARS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얼마 전 항공사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뒤로는 당분간 공항에 갈 일이 없어 다행이다 싶었다. 알면 아는 만큼, 들여다보면 들여다보는 만큼 괴로워지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혹시 오늘도 내가 편하고 즐겁게 누리고 있는 어떤 대상이 누군가의 고통을 깔개로 만들어진 것일까봐, 나도 그 고통의 한 부분일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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