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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문화프리즘] 문이 닫힌 세계

김슬기 기자
입력 : 
2020-07-25 00:05:01
수정 : 
2020-07-25 00: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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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했다는 실감은 닫힌 문에서 왔다. 봄 이후 많은 미술관, 도서관, 공연장, 극장이 문을 닫았다. 난생처음 만나는 세계. 어릴 적 보던 만화 '2020 우주의 원더키디'에서처럼 날아다니는 차와 우주선을 볼 줄 알았건만, 현실의 2020년은 디스토피아 SF 영화 모습으로 나타났다. 갇힌 생활을 하다 보니 산책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숲길을 걷고, 마을 도서관을 찾고, 미술관에 가는 일이 그리 소중한지 몰랐다. 마음대로 문을 열 수 없는 세계는 올여름 가장 재미있게 본 미국 드라마 '설국열차' 세계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열차가 출발한 후 7년 뒤를 그린 이 드라마는 17년 뒤를 다룬 봉준호 영화의 '프리퀄' 역할을 하며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무한동력의 계급열차를 그려낸다. 60칸 열차는 1001칸으로 늘어났다. 꼬리칸과 3·2·1등칸의 묘사는 더 세밀해졌다. 꼬리칸에서 촉발된 혁명의 서사는 10부작 길이로 늘어나면서 지루한 형사물이 됐다는 혹평도 나왔다. 하지만 애초에 자크 로브와 장마르크 로셰트가 그린 원작 만화 세계관과는 드라마가 더 가깝다. 원작에도 거대한 열차 내부를 이동하기 위한 내부 열차가 있었고, 열차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목숨을 희생하는 영웅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원작의 주제의식은 한 치의 희망도 허용하지 않는 절망이었다.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묘사는 1등칸 내부를 장식한 명화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모네와 마네 등의 걸작이 1등칸 객실과 복도를 장식한다. 설국열차 승객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건 문을 여는 권리다. 손목에 이식된 칩으로 각자가 열 수 있는 문이 결정된다. 꼬리칸 승객은 앞으로 한 칸도 이동할 수 없지만, 1등칸 승객은 1001칸 전체를 내 집처럼 드나든다. 수 세기 전 걸작들은 지구의 마지막 날 급히 열차에 실렸을 것이고, 이들을 관람할 권리는 1억달러가 넘는 돈을 지불하고 티켓을 산 부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설국열차 모습은 공공에게 개방된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이 얼마나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지 알려줬다. 현실 세계에서 이 그림이 걸려 있는 영국 내셔널갤러리는 전 관람객에게 공짜로 열린다. 파리 루브르박물관과 뉴욕 현대미술관 입장료도 1만원 남짓한 푼돈이다. 지금처럼 자유롭게 여행하고 모두가 모두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걸작을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이미 전염병은 계급을 분화시키고 있다. 온라인 강의가 지속되자 부자들은 개인 교습을 하고 하층민 자녀들은 게임과 TV 앞에서 방치되고 있다. 교육과 노동의 공간은 만남과 섞임이란 고유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설국열차는 결국 이 시대의 탁월한 은유다. 코로나19가 과거의 어떤 역병보다도 빨리 전파된 건 기술의 발전으로 얻은 비행기와 차, 열차의 속도로 인해서였다. 도시에서 밀집 생활을 하고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한다면 앞으로도 전염병 대유행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설국열차가 '코로나 시대'에 백색의 공포와 함께 전하는 건 더 이상 세계의 문이 열린 채로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준엄한 경고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공간과 도시가 열릴 때 삶은 다층적이 된다"고 증언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대의 도시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김슬기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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