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학사용설명서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학생들이 지난달 15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 등록금 반환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학생들이 지난달 15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 등록금 반환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권을 보면 12세기 이후 생겨난 대학교(university)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은 14세 전후로 4년간 예비과정인 인문학부에 등록했고, 과정 후 2년간 의무강의를 해야 했다. 이후 대학원에 해당하는 신학과정 7년을 마치면 다시 4년의 전문과정을 이수한 후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4세에 시작한 공부는 어느덧 30세가 훌쩍 넘어 끝나게 된다. 뭐든지 제대로 공부하려면 학부 4년만으로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유한계급론으로 유명한 미국 경제학자 베블런은 고등학문을 위한 대학교에서 학사과정은 단지 대학원을 위한 예비학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학부는 “더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접촉할 마지막 손길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대학들은 학부과정을 중심으로 급팽창한다. 대학은 4년 과정을 졸업하고 취업하는 거대한 인구조류의 중심에 서게 되고, 대학은 학부에서의 직업교육과 대학원에서의 학문연구가 병행되는 체제를 띤다.

한편 1~2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 관련 연구투자를 계기로 대학은 급격히 대학원 연구중심 대학으로 변모한다. 대학은 지식생산과 투자, 공유의 중심체가 되었다. 하버드·예일처럼 학부경쟁력이 최정점에 있지 않은 수많은 주립대학이 대학원 교육의 경쟁력으로 인해 세계랭킹의 반열에 드는 사례들이 나타났다.

21세기 탈산업사회, 지식경제, 노동시장 유연화 속에서 대학은 다시 한번 큰 변화를 경험한다. 1990년대 이후 성인학습자들이 대거 대학에 유입됐고, 대학팽창에 보수적이던 영국과 독일에서도 급격한 대학의 팽창을 겪는다. 평생학습 개념과 고등교육이 결합하면서 대학 내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대학의 대중화로 사회계층상승을 보장했던 학위의 가치가 떨어진 반면, 대학이 생산한 실용적 지식을 공유하고 이들을 인적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정책적 흐름이 탄생한다. 학위보다는 강좌 자체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시간제 학생의 자격으로 원하는 과목을 수강하며, 학위가 아닌 자격과정을 활용한다. 학부, 대학원, 비학위 과정을 포함하는 대학사용설명서 3종세트가 만들어지게 된다.

돌이켜보면,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학은 여전히 학부가 중심이었다. 1980년만 해도 서울대학교가 유명했던 건 학부입시에서의 경쟁력 때문이었고, 대학원 경쟁력이 강화되기 시작한 건 세계수준 연구중심대학의 기치를 내건 199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반면, 대학이 생산한 지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세 번째 축은 아직 제대로 발달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비학위 과정은 여전히 음지에서 대학의 돈벌이 수단이 되거나 평생교육원 혹은 미래교육원 등의 명칭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에 여전히 대중은 대학을 학벌주의 엘리트 선발을 위한 학부기능 중심으로 본다. 대학원 확장을 불필요한 학위장사라고 본다. 게다가 계속평생교육기능은 ‘뒷문’으로 폄하한다.

정규학위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학위는 예전만큼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학력사회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유연하고 현장과 연동하는 융합지식을 적시에 학습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수시로 변형이 가능한 과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비학위 과정에 대한 관심과 육성은 우리가 대학을 사용하는 방법을 크게 바꿀 수 있다.

외국 대학들의 웹사이트 입학(admission) 메뉴를 검색해보라. 아이비리그 대학들에서도 학부 입학, 대학원 입학과 함께 계속교육(continuing education) 입학 메뉴가 눈의 띈다. 반면, 한국의 대부분 대학들의 입학 웹사이트에는 오직 학부 및 대학원 입학 안내만 있다. 서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교육부의 고등평생교육 지원사업은 전제부터 학부중심, 학위중심, 전일제 학생중심으로 짜여 있다. 넓게 보면 한국처럼 고등교육 이수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학사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현재의 프레임을 더 확장하고 유연화해야 한다. 산업 4.0과 인공지능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서라도 ①대학원 수준에서, ②비학위 자격개발과정 중심으로, ③시간제 학생을 대상으로 ④원격교육을 충분히 가미한 방식의 교육을 활성화할 방책이 필요하다. 이미 학위를 받은 사람들의 전직과 전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고등교육 수준의 비형식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학위수여는 대학이 생산하는 교육과 연구의 한 가지 결과물일 뿐이다. 결코 전부가 아니다. 모든 성과를 ‘학위’로 수렴시키는 현재의 대학사용설명서에 대한 대대적인 개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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