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를 본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아무래도 아인슈타인보다는 조던이다. 넷플릭스로 요즘 마이클 조던의 ‘화양연화’를 다시 만난다. 1997~1998시즌의 마지막 도전을 담은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다. 조던은 나의 스무 살 전후를 잇는 키워드의 하나지만, 이처럼 정면으로 그를 본 적은 없다. 병적 수준의 승부중독, 심신을 갈아넣는 코트에서의 공격성, 그 이후의 인간적 공허…. 그게 농구든 신발이든 ‘에어 조던’으로만 소비했을 뿐 ‘인간 조던’은 잘 몰랐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조던이 남자애들의 허세 속 영웅이었다면, 아인슈타인은 그 반대편에 있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함께 걸을 때>라는 제목만으로도 긴장되는 책 속 그처럼 주눅들게 했다.

보는 것과 읽는 것. 과거 읽는 것에 어떤 사명을 건 것처럼 했다. 곧잘 ‘취미=독서’라고 쓰면서 좀체 읽는 것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건 공부고 단련이었다. ‘텍스트’라 하고, 지식창고에 대한 욕망을 쏟아냈다. 의무감과 두려움도 보였다. 목적 없는 읽기는 무용했다. 그래서 읽는다는 건 세계와의 “대화”(천쓰이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이면서 “투쟁의 위대한 유산”(영국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이었다. 치열하게 읽어야 했다.

반면 본다는 건 그 단련들 사이 ‘쉼’이었다. TV나 영화가 고작이었겠지만, 부담 없는 시간이었다. 읽는 것은 앎을 위한 것이고, 본다는 건 즐기는 것이었다.

지금 그런 경계를 짓는다면 아마 촌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꼰대’라는 핀잔 정도는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여전히 난 그러하지 못하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PC-인터넷(포털 세대)-스마트폰(앱 세대)’ 등 세대가 진전될수록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읽는 것의 지식창고 역할이 감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보는 것’의 지식화·텍스트화 가능성이 만든 풍경이다. 정보 매체들의 연결 속에서 보는 것도 기록과 보존·기억 같은 텍스트적 기능을 상당히 갖추게 되면서다.

실상 스마트폰 세대에겐 넷플릭스가 텍스트다. 유튜브도 텍스트다. 그들에겐 보는 게 지식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라스트 댄스>처럼 넷플릭스 속 정련된 콘텐츠들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기에 ‘기억’이란 기술적 변수마저 사라지면서 보는 즐거움은 지식 업로드 수단이 된다. 넷플릭스의 영화든 다큐든 문학·역사·철학·예술의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세부 내용은 유튜브·구글·네이버에서 검색해 완성한다. “정보시대가 부리는 마법은 우리가 더 적게 알아도 괜찮게끔 해준다는 것이었다. 외부의 똑똑한 하인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란 뉴욕타임스 칼럼처럼 요즘 미국 대학생들의 리포트를 쓰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구글’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기억하는 건 비효율 취급을 받는다. 물론 독서 근본주의자들의 “얕은 지식과 지혜”에 대한 탄식은 여전하겠지만….

읽는 건 ‘메모리(기억)’하는 것이고, 보는 건 ‘스캔’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의 미묘한 추상성이 가져온 차이다. 기억은 전자회로의 입자처럼 새겨지지 아니하며, 마녀의 거울 속 형상처럼 갑작스레 ‘떠오른다’. 영구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읽는다는 건 문장과 의미 모두를 ‘메모리’해야 한다. 암기든, 메모든 자신의 코드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보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코드(장면)를 ‘스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읽는 텍스트와 보는 텍스트의 차이는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읽는 것’의 가장 소중한 덕목인 ‘사유’ 과정의 밀도 때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지금 알고 이해하는 모든 것에 한정되어 있지만, 상상력은 온 세상을 포용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앞으로 알고 이해하는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유에는 지식 이상의 것이 존재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보는 것은 앞으로도 읽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걸까. 그렇지만은 않다. 넷플릭스의 장면장면이 점점 텍스트화할 때 보는 것과 사유 과정 또한 더 가까워질 것이다. 기술로 시공간의 기억 구조가 달라지면, 사유 과정 또한 동일하리라 생각할 수 없다. 비주얼 텍스트 시대엔 또 다른 사유 구조와 법칙이 생겨날 수 있다는 의미다. 그건 보고, 검색하고, 방대한 다른 생각들을 만나 ‘조합-종합-재창조’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장 중요한 사유는 ‘선택’할 줄 아는 사유다. 그래서 스캐닝에도 ‘영혼’이 필요할지 모른다.

나에겐 아직 조던은 스캔이고, 아인슈타인은 메모리다. 하지만 얼마 뒤엔 넷플릭스에서 아인슈타인을 스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텍스트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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