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는 두되 책과의 거리는 좁혀봐요

김태훈 기자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출판계에도 변화가 감지되는 가운데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진열된 바이러스 관련 서적들 옆으로 마스크를 쓴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출판계에도 변화가 감지되는 가운데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진열된 바이러스 관련 서적들 옆으로 마스크를 쓴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람 구경’을 하기 힘들어진 것은 서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종이책 실물을 만져보고 내용도 들여다봐야 살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독자들은 책방을 찾는다. “온라인서점에선 책 앞부분을 읽을 수 있는 미리보기 서비스도 하지만 그 짧은 분량만으로는 맛보기도 안 되거든요.”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만난 대학원생 정원준씨(30)는 대학의 연구실과 도서관마저 문을 닫으면서 집에만 있기 답답해 서점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서점 역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라 책 보기가 다소 불편해지기는 했다. 서점을 찾은 방문객들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내부에 비치한 의자를 줄였기 때문이다. 정씨는 나온 김에 필요한 책을 한꺼번에 고른 뒤 캠퍼스가 다시 정상적으로 열릴 때까지 집에서 한동안 책에 파묻혀 보내는 것이 목표다.

‘집콕’ 생활 위한 책 구매 늘어

읽는 사람은 읽는다지만 굳이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어도 책 읽는 풍경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월 11일 발표한 ‘2019년 국민 독서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성인들의 독서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매체 등 다른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이용하는 것이 책을 멀리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종이책을 대신해 스마트폰을 통한 읽을거리를 찾는 변화는 감지돼 왔지만 독서율을 눈에 띄게 하락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집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출판·서점업계와 종이책을 선호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비관적이라고 볼 수 없는 변화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청소년의 독서량은 10%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 청소년층의 종이책 독서량은 32.4권으로 2017년에 비해 3.8권 늘어났다. 교과 학습용 참고서 등은 제외하고 집계된 수치다. 다만 청소년 독서율은 90.7%로 1.0%포인트 감소했다. 그래도 성인과 비교하면 성인 독서율과 독서량이 각각 52.1%, 6.1권으로 같은 기간 각각 7.8%포인트, 2.2권 줄어든 것보다는 확연하게 대비됐다. 전체 성인의 독서량은 줄었지만 종이책을 읽는 성인의 독서시간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청소년을 비롯해 꾸준히 책을 읽는 독자들의 충성도는 오히려 높아지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어릴 때부터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 독자층이 꾸준히 자리 잡는 현상을 고무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아동·청소년용 도서시장이 꾸준히 성장해온 점을 보면 이미 감지돼 왔다. 청소년 문학·교양서적이 은근하고 꾸준한 인기를 끄는 데 착안해 지속적으로 청소년 도서 발행을 늘려온 한 출판사의 관계자는 “웹소설이나 라이트 노블처럼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는 청소년들이 더 빠르게 늘고 있어서 이들이 종이책에도 눈을 돌릴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는데 판매량을 놓고 보면 청소년용 책들이 무시할 수 없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기성작가들도 진지하게 청소년들의 고민과 감정을 다루는 작품을 내놓기도 하고,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던 양질의 청소년 도서 역시 더 많이 국내에 들어온다. 선택의 범위가 보다 넓어지고 수준도 높아졌기 때문에 성인 독자들에게서도 인기를 끄는 베스트셀러도 여럿 나온다. 한 인터넷 대형서점 관계자는 “성장소설이나 ‘영 어덜트’ 소설이라 불리는 분야의 책들은 청소년은 물론 20대 성인 독자들도 공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인터넷 사용의 영향으로 짧고 가벼운 문체의 작품을 선호하는 독자들도 늘어나는 추세가 보인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개학이 연기되면서 출판시장 시각에서는 ‘불행 중 다행’으로 ‘집콕’ 생활을 하는 아동·청소년을 위해 부모가 책을 구매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학교에 못 가는 대신 학교에서 배울 교과나 교양에 도움이 되는 서적을 읽게 지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베스트셀러 1위는 카뮈의 <페스트>

인터넷서점 예스24의 자료를 보면 교육부의 첫 개학 연기 발표가 있었던 2월 23일부터 3월 15일까지 3주 동안 아동·청소년 도서 판매량은 아동용 도서의 경우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64%, 청소년용 도서는 96.4%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부터 학기마다 국어시간에 한 권의 책을 읽는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이 시행되면서 청소년기의 문학 책 읽기가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문학도서를 중심으로 꾸준히 증가해온 판매 추세가 최근 집콕 독서 현상으로 더 가팔라졌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이와 함께 출판시장에서는 업계에 미친 타격을 줄이기 위해 가정 내 생활시간이 늘어난 변화에 맞춰 독자들을 끌어들일 방안도 함께 찾아가고 있다.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느라 답답해하는 아이들을 달랠 수 있는 놀이교육·오락용 도서가 대표적이다. 또 연령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컬러링북’·‘아트북’ 등 종이책에 대한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책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적인 종이책 독서층 가운데서 유독 주목받는 책 가운데는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급격히 판매량을 늘리며 베스트셀러 1위에까지 올라 눈길을 끌었다. 페스트(흑사병)가 전염되는 사태와 맞닥뜨린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다시 인기를 끈 것이다. 현재 서점에서 시판 중인 20여 종 번역본들의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배 가까이 늘었다.

한편 ‘청소년 책의 해’로 지정된 올해 마침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독서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과 맞물려 청소년용 도서를 전문적으로 추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가 국내 최초로 문을 열고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청소년문학상도 신설되는 등 다양한 활동도 이어지고 있다. ‘ㅊㅊㅊ’이라는 이름을 붙인 청소년 도서 전문 사이트에서는 9명의 전문 필진이 연간 200여 건의 북 큐레이션을 제공하고 청소년들이 직접 나서서 고른 책들도 추천을 받는다. 청소년문학상 역시 청소년 심사위원단을 모집해 청소년의 눈으로 책을 심사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안찬수 실행위원장은 “청소년들이 늘 어른들이 추천하는 책만 보는 수동적인 독자가 아니라 스스로 문학을 향유하는 주역이 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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